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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살 Dec 29. 2020

[한편보고서 8]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보며 울었다. <Set It Up>

비서는 피곤하다. 쉴 새 없이 상사의 그림자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한다. 어쩌면 상사 본인보다도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수도. 그런 와중에 상사가 일중독이라면 더 곤란하다. 상사의 일 중독이 곧 비서의 업무 과중이니까.


음식에 들어가는 토핑, 좌석 등급 업그레이드는 예사고 헤어짐 통보와 병원에 소변 제출까지.. 영화의 인트로는 꽤나 흥미롭다. 그러다 하퍼(조이 도이치)와 찰리(글렌 포웰)의 비서 업무를 볼 때쯤엔 '도대체 얼마를 벌면 저렇게까지 일할까'싶다.

이미 예고편을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하퍼와 찰리는 쉴 틈 없는 "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의 상사끼리 사랑에 빠지도록 유도한다. 지시와 명령만 내릴 뿐 주도적으로 대부분의 실무를 처리하는 건 비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퍼는 스포츠 기자를 꿈꾸며 저명한 스포츠 기자 커스틴(루시 리우) 밑에서 일하는 재빠른 비서다. 찰리는 승진을 목표로 상사 릭(타이 딕스) 아들의 학교 숙제까지 도맡아 하는 열혈 비서다. 멈추려 하지 않으면 절대 멈출 것 같지 않은 상사들의 일중독 때문에 불쌍해진 두 비서는 야심하고 응큼한 계획을 세운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임무를 완수한 후(릭과 커스틴이 사랑에 빠진 후) 자유라는 달콤함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것이 기승전결의 '결'이 되기 위해선 부족했던 듯싶다.


되고자 하는 그 바닥 안에 속하기 위해 하퍼는 커스틴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돈벌이는 돈벌이일 뿐, 꿈과 직접적인 연관이라곤 없는 그 일은 오히려 하퍼를 갉아먹을 뿐이었다. 결국 그만두는 날까지 마무리한 글 하나 없이 하퍼는 그 바닥으로부터 나왔다.


"하루가 너무 길고 힘들어서 내가 시간이 있을 때 뭔가를 쓰면 엉망"이라는 하퍼의 대사는 곧 내 모습이기도 했다. 하퍼는 커스틴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망설이고 홀로 제고하다 모든 것을 미완으로 남겨두고 말았다.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진 하퍼와 친구 베카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거기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기사 하나 쓴 게 없었어. 나는 진짜 꽝인가 봐. 몇 달째 같은 기사를 쓰려고 애쓰고 있어. 얼마나 쓰레기인지 끝내지도 못하겠어"

"초고니까 당연하지. 당연히 끔찍하겠지만 어째야겠어 하퍼? 다시 돌아가서 더 낫게 써야지. 하지만 네가 실제로 하기 전에는 더 낫게 할 수가 없잖아. 형편없는 뭐라도 써"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없을 땐 망할 놈의 장애물이 시간뿐인 듯하다. 그러다 한 발짝 용기를 내 남는 게 시간인 상황을 만들고 나선 또 다른 망할 것들이 생긴다. 그렇게 이 핑계 저 핑계로 편승하다 보면 아무것도 끝내지 못한 미완의, 미성숙한 나만이 남는다(+1로 나이도 따라온다). 탈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어찌 됐건 좌절한 엉덩이를 떼고 의자에 앉아 모니터건 종이건 글자를 적어 내려가는 것뿐이다. 쓰는 것에 의의를 두겠다던 초심이 또다시 그럴듯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타성으로 돌아가버리기 전에.


느닷없이 이별 후 코미디 영화를 보며 우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위플래시> 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강력한 한방을 먹었다. 비루해 보였던 하퍼조차도 실은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배우이고, 그 앞에 앉은 나만이 진짜 하퍼인 것 같았다.


쓰고 나선 이다지도 개운한 게 글인 걸 보면 글을 쓰며 살아야 후련하고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쓰고, 여행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창작이 되는 그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뜨거운 질투와 냉정한 자극을 받는다. 내 인생의 방향이 늘 그곳으로 가고 있음은 틀림이 없다. 세상엔 부지런하고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더 어렵긴 하지만 , '그럼에도' 좋은 일이니 기꺼이 계속해야 한다.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2018)
감독 : 클레어 스캔런
출연 : 조이 도이치, 글렌 파월, 루시 리우, 테이 딕스, 메러디스 해그너, 피트 데이비드슨, 타이터스 버지스
각본 : 케이티 실버먼

사진 출처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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