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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Oct 24. 2018

‘장자’. 꿈을 꾸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김정탁의 장자 (내편)

장주(莊周)의 이야기 장자(莊子)는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읽힌다. 학자마다 각자의 학문적 성향과 의식의 흐름에 얹어 장자를 해석한다. ‘자유’의 주제를 중심으로 장자를 해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장자를 빌려 음양의 회동과 참 나의 발견이라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장자의 이분적 표현이 ‘역지사지’의 도(道)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안에 장자의 모든 사상이 담겨 있다고 단언하는 학자도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장자를 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장자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은 장자를 역사가 해체된 고전으로 읽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전은 역사를 떠난 실존적 관점에서 읽을 때, 재미있다. 또 그렇게 읽어야 삶의 현장에서 고전의 가치와 의미가 빛을 발할 수 있기도 하다. 장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런 실존적 장자 읽기는 우리에게 ‘큰 앎(大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래야 장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앎이 작은 앎(小知) 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 강신주는 자신의 책에서 “노자는 국가주의자이지만 장자는 아나키스트다”는 주장을 했다. 이것은 춘추전국을 근대의 국가 개념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 춘추전국의 지식인들은 모두 ‘천하 주의자’였다. 그들은 천하가 나라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공자조차도 자신의 고향인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아침에는 초나라, 저녁에는 위나라를 섬기는 것이 당신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기 전에 장주는 누구이고 그는 어떤 시대를 살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편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언어적 장치도 장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장자를 읽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저자의 편지’라는 글에서 장자의 ‘호랑나비의 꿈’을 ”사람들이 꿈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지 않는 데서 출발해서 결국 삶과 죽음의 차이도 없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였지만, 이 역시도 매우 성급한 해석이다. 중국의 고전학자이자 역사가인 이중톈은 이 문장에 사용된 허허연(栩栩然)과 거거연(遽遽然)을 세밀하게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허허’는 기뻐서 만족하는 모습이고, ‘거거’는 놀라거나 의아해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 글 속에서 꿈속의 나비는 흡족한 날갯짓을 하지만 다시 깨어난 나비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꿈과 현실이니 삶과 죽음이니 하는 말은 다소 지나친 면이 있다.     


노자와는 달리 장주의 생몰은 대체로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맹자보다 2살이 어린 장주는 대략 기원전 369년에 태어나 286년에 죽었다. 장주는 송나라 몽 사람으로 칠원리를 지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전국(戰國)의 패권이 점차 진(秦)나라 쪽으로 기울고 있을 때였고, 그 배후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상앙’이다. 상앙은 장주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다. 그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면서 세 가지 방안을 가지고 갔다. 제도(帝道), 왕도, 패도(覇道)가 바로 그것이었다. 상앙을 스카우트한 진 효공은 이렇게 말했다.      


“제도와 왕도가 좋기는 하지만 실현하려면 적어도 수십 년에서 100년 넘게 시간이 걸릴 거요. 과인은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소.”


결국, 진 효공은 상앙의 세 가지 변법 중 패도의 변법을 선택했고, 이는 천하(天下) 제패를 위한 약육강식의 세계로 전국을 몰아갔다. 특히나 장자가 살았던 전국(戰國)은 공자나 노자가 살았던 춘추(春秋)하고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중국의 유학자이자 역사가인 이중텐은 한가지 고사성어를 들어 춘추와 전국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바로 맹자의 ‘양혜왕상’에 나오는 ”50보를 도망친 이가 100보를 도망친 이를 비웃는다. “라는 성어다.      


춘추의 시대에는 불축배(不逐北)라 하여 패배한 적을 쫓을 때는 50보만 쫓는다는 불문율이 작동되고 있었다. 춘추는 전쟁 자체가 많지 않았지만, 그 규모도 작았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일단 패배한 적은 살려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50보를 쫓아가도 도망가는 적을 잡지 못하면 더는 쫓지 않았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은 여기서부터 유래되었다. 심지어 도망가던 적이 늪에 빠지면 그를 쫓던 상대방은 그가 늪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춘추의 전쟁은 일종의 목숨을 건 스포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국은 달랐다. 전국의 전쟁은 절멸 전쟁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이 패도이기 때문이었다.     


패배한 자는 영원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세상, 그것은 오늘날로 따지면 무한 경쟁과 영구 도태의 시대, 바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과 같을 것이다. 장주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장주는 장자를 썼다. 장주는 결국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되던지, 아니면 효율성과 성공의 길을 버리고 자신의 도(道)에 집중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장자의 ‘대종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샘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땅에 모여서 서로 물기를 뿜어 주고 서로 거품으로 적셔 줍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자유로이 지내는 것만 같겠습니까?” 사실 이 말은 ‘제물론’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장주의 주장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너희들이 무언가를 하려는 순간부터 고통은 시작된다. “장주가 주장하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래서 장자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는 ‘제물론’을 읽고 있자면 마치 서양의 르네상스를 보는 듯하다. 르네상스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면 장자는 그보다 너 나아가 삼황오제(三皇五帝)까지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장자에 따르면 법(法)이 필요한 것은 예(禮)가 무너졌기 때문이고, 예가 필요한 것은 의(義)가 사라져서이고, 의가 필요한 것은 인(仁)이 없기 때문이며, 인은 덕(德)의 부재로부터 나왔고, 덕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도(道)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여 춘추와 전국을 거쳐, 이제는 천하를 두고 쟁패하는 세상에 이르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맹자가 ‘대동(大同)’이 허물어진 세상에서의 덕과 의를 꿈꾸었다면 장자는 ‘대동의 세상’ 자체를 꿈꾸었다. 큰 도(道)에는 인의가 필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대동’이란 좀도둑이 없고, 강도가 횡행하는 일도 없어서, 집집 마다 바깥문을 닫아두는 일이 없는 하나의 천하를 말한다. 장자는 문명은 인간을 ‘대도(大道)’에서 점점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문명 이전의 씨족 사회, 즉 대동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저자는 ‘소통’이란 주제를 놓고 장자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다소 황당한 일면이 있다. 장자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위무위(爲無爲), 즉 무위로 무위를 이루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는 ‘소통’이란 유의를 이루기 위해 장자의 무위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장자 ‘인간세’를 보면 위나라로 가 왕도를 펼쳐 보이겠다는 안회를 공자가 말리는 장면이 나온다. 공자는 ”의도를 가지고 군주를 감화시키면 그가 어찌 감화되겠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이 소위 위무위, 즉 ‘의도하지 않는 것을 의도한다.’라는 뜻으로, 바로 장자가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데 저자는 ‘소통’이라는 의도된 틀 안에서 장자를 재구성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무위로 유위를 이루고자 함”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장자에 관해 쓴 또 다른 장자를 읽고, 그 장자에 대한 비평을 또 읽는다. 이는 마치 진짜의 그림자를 읽고 그림자의 그림자를 또 읽는 것과 같다. 결국, 문명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가.          


만약 장자에서 소통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기의(Signifié)가 아닌 기표(Signifiant)에서 찾아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장주는 유가나 묵가, 심지어 노자와도 다른 표현법을 사용한다. 정언약반(正言若反), 즉 역설적 표현을 사용하되 그 표현이 매우 문학적이다. 또한, 논리를 동원한 지적 강요보다는 체험에 근거한 이야기로서 논리를 전개한다. 무엇보다 장주의 관심은 ‘지(智)’에 있지 않고 ‘혜(惠)’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국’이라는 거대 담론보다는 ‘수신’이라는 삶에 근접한 도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것이 장자의 소통 방식이다.     


장자 읽기에 있어서 다시 한번 강신주의 말을 돌이켜 본다. 그는 장자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특유의 이분법적 레토릭을 구사하여 ‘소요유’에 나오는 곤과 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여러분 행복하시나요? 날개는 가지고 있으신가요? 만약 지금 행복하다면 날개가 없는 겁니다. 우울하다면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힘들지 않으면 길들여 집니다. 우리 비겁해지지 맙시다.”      


강신주는 장자의 대붕을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앨버트로스에 비유하면서 많이 배운 자와 큰 꿈을 가진 자,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가치와 인격을 가진 자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고뇌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작은 날개를 가진 자의 행복에 견주어 큰 날개를 가진 자의 우울한 자유를 말했지만, 장자에 나오는 대붕의 날개를 그런 고급스러운 허세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장주가 말한 상덕(上德)은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 하려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장주는 심지어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조차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변무’편에 잘 나타나고 있다.      


“역대로 많은 사람이 생명 이외의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소인들은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선비들은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며, 대부들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성인들은 천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하는 일이 다르고 이로 인해 얻은 명성의 정도도 다르지만, 천성을 위배해 자신의 생명을 해쳤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따를 바가 못 된다.”      


강신주의 장자에는 “길들여지지 말고, 비겁해지지 맙시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높은 ‘자유 의지’가 강조되어 있지만, 사실 장주의 ‘자유’에는 ‘자유 의지’가 빠져 있다. 좀 더 극단적인 표현을 쓰자면 장주는 ‘자유 의지’를 배척한다.      


장자가 마음 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대붕은 태풍이 불어야 비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날갯짓해야 날 수 있다. 언젠가 동물의 세계를 그리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까마귀가 독수리를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활강에는 능숙하지만, 순간적인 비상이 불가능한 독수리를 날렵한 까마귀는 오르내리며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 장면으로 보며 “결국 독수리는 죽은 고기밖에 먹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이라는 험악한 시대에 맹자는 더 세차게 날갯짓하라고 재촉했고, 장자는 날개를 접으라고 권고했다. 이중톈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알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란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유 의지를 가진 자만이 결국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니 메추라기는 메추라기대로 붕은 붕대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장주

맹자와 장자, 유교와 도교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역사와 사회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얽혀져 있다. 따라서 내가 의도한 바대로 세상은 움직여 주지 않는다. 성공보다 실패를 많이 하는 우리는 실패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와 해석, 그리고 위안이 필요하다.      


실용적인 것, 가능한 것에만 안주하는 태도는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학자로서의 태도는 아닌 것 같다. 논어의 ‘미자’편은 “천하는 큰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듯 그렇게 가고 있다.”라고 회한 담긴 표현을 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그래도 나는 거슬러 가고자 한다.”라는 다짐이 들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중국의 학자 이중톈이다. 그는 스스로 “대범한 도가를 좋아하고, 실재적인 유가에 찬성한다”라고 말하면서 유가는 ‘天’을 이야기한다면, 도가는 ‘人’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공산당 일당 체제를 기반으로 대국 굴기를 꿈꾸는 중국에서 살아가고 말하고 쓰는 학자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글을 보면 아슬아슬하다.      


“물론 국가는 강성해야 한다. 국가의 강성은 국민 모두의 공통된 바람이다. 문제는 국가가 왜 강해져야 하는지에 있다. 결국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다. 그러나 국가가 강성해지기 위해 백성이 ‘짚으로 만든 개’가 되어야 한다면, 이런 강성함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부분은 장자의 생각에 더 찬성한다. 백성이 모두 진실하게 자유롭게 살고, 사람들이 서로 관용을 베푸는 나라가 바로 좋은 나라다. 이런 나라가 강국이 될 자격이 있고, 강성해야 한다. 여기에 한마디만 덧붙이면 바로 이러한 나라만이 진정한 강국이며, 영원히 강성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걷는 장주

장주는 ‘양생주’에서 “기름은 땔감이 되어 한 번으로 활활 타고 없어지지만, 불씨는 다음 땔감으로 전해져 끝날 줄 모른다”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대로 ‘전국’은 사라졌지만, 장자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무한 경쟁과 정당화된 불평등의 시대에 여전히 장자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기원전 3~4세기의 전국은 21세기의 신자유주의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 제조업자들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돈벌이에 관한 관심 덕분이다. 이라고 말한 애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이는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 결실도 얻게 된다."      


장자의 ‘위무위’를 여기에 적용해 보면 매우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논점이 흘러가게 된다. 돈벌이가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아무런 의도나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신자유주의 세상인가?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천성이 맞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도덕 감정론을 인용한다면 이러한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완전한 정의, 완전한 자유, 완전한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모든 계층의 최고도 번영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증하는 매우 단순한 비밀이다"     


도덕 감정론에 기술된 이 문구는 애덤 스미스의 중심 사상이자 그의 정치-경제학적 원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스미스는 ‘동감(同感)’ 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인간관계의 세 가지 미덕 (신중함, 정의, 자비심)을 강조했다. 인간의 이기심은 매우 신중하게 작동되고 통제되어야 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동감의 토대 위에서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사상이다. 그러나 장자는 이야기한다. “정의, 자유, 평등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을 의도하는 순간부터 고통은 시작된다.” 애덤 스미스는 잘 관리된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했고, 장자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믿었다.     


신자유주의의 대모 격인 마거릿 대처는 집안 대대로 믿어 온 감리교인 이었다. 그녀는 늘 “남에게 기대지 말고 무엇이든 자기 힘으로 하라!", “늘 당당하고, 무엇보다 모범적으로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성장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가르침은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성경 구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장자는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사회가 누구냐? 사회, 그런 것은 없다. 개별자로서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 대처의 유명한 말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도출된 신념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그녀의 언어 중 사회를 인격화한 표현은 그녀가 사회를 도전의 대상으로 삼아 성장해 왔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녀에게 있어선 일종의 정치적 '구원 이야기' 임이 틀림없다.      


장자의 꺼지지 않는 불씨는 오늘날 어떤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을까?. 전국에서 장자와 맹자가 그랬듯이, 대국굴기의 중국에서 이중톈이 그러듯이 장자를 읽는 우리는 어떤 가능성 없는 나비의 꿈을 꾸어야 할까? 꿈속에서 허허로우며 깨어서 거거스러운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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