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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Nov 20. 2018

‘위기의 이성’ 이성을 맹신하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위기의 이성

지난 13일 인천 한 아파트에서 중학생 4명이 동급생을 집단 폭행해, 결국 피해 학생이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 학생 중 1명이 구속 당시 피해 학생의 패딩을 입고 있어 국민들의 분노를 샀는데, 그 가해자 학생은 패딩을 뺏은 것이 아니라 바꾼 것이라 진술했다. 우리는 이 ‘패딩’에 대해서 왜 분노하는가? 이성적이라면 패딩을 바꾼 것과 갈취한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은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바꾼 것과 빼앗은 것’의 차이가 아니라 죽은 친구의 패딩을 버젓이 입고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책의 저자 줄리언 바지니는 보기 드물게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나 현안에 대해서 매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하였고, 합리적인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다른 저서 ‘에고 트릭’이나 빅 퀘스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줄리언 바지니는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인지에 대해서 매우 깊게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 이성’과 ’ 신념‘ 그리고 ’ 과학’과 ’ 도덕‘의 문제에 관해 쓴 책이 바로 이 책 ’ 위기의 이성‘이다.     


줄리언 바지니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나 그의 무신론은 도킨스나 히친스, 다니엘 데닛이나 마이클 셔머와 같은 무신론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자기 이론은 환원론적이지 않고, 과학이 되었던, 이성이 되었던 어느 한 가지의 잣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회의론자이지만 합리적 회의론자이다.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에 대한 불합리한 비판에 대해서는 유신론자들보다 더 신랄하게 공격하곤 한다.      


최근 들어 무신론 학자들의 필봉은 도덕의 기원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종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비윤리성을 조명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마이클 셔머가 그의 책 ‘도덕의 궤적’에서 한 다음과 같은 질문 속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나타난다.      


”우리 인류는 어느 정도 도덕 감각을 타고나며, 이미 오래전부터 추상적 추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씨족 공동체가 마을이 되고, 군장국가와 도시국가를 지나 민족국가의 형태로 사회 집단이 커짐에 따라 인류의 도덕은 조금씩 세련화 되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비교적 완만하고 느리게 진행된 도덕 진화는 최근 200~300년 사이 급격하게 가팔라졌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


이 질문에서 마이클 셔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이다. 도덕의 발전은 종교의 시대보다 과학의 시대에 더 급속히 이루어졌다는 것. 1,80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몽적 인본주의와 뒤이어 일어난 과학혁명의 시대에 과학적 합리주의가 확립되었고, 이 시대에 인간은 윤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을 끌어올림으로써 지금과 같은 도덕적 진보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또한, 셔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 원리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통해 점점 정교해지면서 오늘날 도덕의 영향권을 동물로까지 확장되었고, 세계와 자연,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과학과 이성의 기준에 따라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도덕의 진화에 속도가 붙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에는 인과관계가 모호하다. 역지사지가 과학을 통해서 발달했다는 이론이나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 진화에 속도가 붙었다는 주장 역시 그 논리의 연결고리가 느슨하다. 이 책의 저자 줄리언 바지니 역시 이 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소위 과학주의, 증거주의에 대한 경고를 보내면서 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는 합리적 회의주의자 되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줄리언 바지니

줄리언 바지니는 인간의 신념에 대한 문제로 이 책의 서두를 연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만나서 토론을 하면 결국 유신론자는 유신론자가 되고 무신론자는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최종 심판자는 이성이 아니라 추론가 이다. 합리성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도구일 뿐, 대단한 권위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각자의 논거에 의한 각자 되기’는 비단 유신론과 무신론 간의 논쟁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증거가 제사장으로 대접받는 과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이다. 이 영웅적 과학자들의 논쟁을 보더라도 증거와 논거가 신념의 결정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만나서 논쟁하지만 돌아서서는 논쟁의 결과물과는 상관없이 애초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의 논거를 보완하는 데 집중한다.      


줄리언 바지니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정초주위’와 ‘정합주의’를 끌어들인다. 어쩌면 종교란 정당한 믿음과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인식을 강조한 정초주의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성은 “명백하게 내게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의 자명한 이치가 아니다. 결론과 전제가 서로 지탱하는 시스템이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신념과 신념이 매듭으로 연결된 부드러운 망으로 표현되는 정합주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정합주의는 보다 쉽게 기존의 믿음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소위 ’신념의 무효화‘가 정합주의뿐만 아니라 정초주의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떠한 정당한 믿음과 건전한 전제도 때에 따라서는 무효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저자가 정초주의나 정합주의를 꺼내 든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 완전한 믿음‘, ’ 반석과 같은 믿음‘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학주의와 증거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다.     


이성은 이론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증거를 지지하는가? 이 책에 따르면 둘 다 아니다. 저자는 몇 가지 예를 든다. 1926년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을 만났는데, 이때,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에게 ”관찰 가능한 크기만으로 어떤 이론을 만들려 하는 것은 아주 많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러나 1930년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대부분 동료가 사실들에서 이론을 보려 하지 않고 이론에서 사실들을 보려 한다. 그들은 과거 언젠가 받아들인 개념의 그물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저 파닥거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에게 한 말은 이성이 이론을 지지한다는 취지의 말이었던 반면 그가 솔베이 회의에서 한 말은 반대로 이성이 증거를 신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의 이성은 필요에 따라 이론을, 때에 따라서는 증거를 추종한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이성은 ’ 자기 생각에 대한 믿음‘ 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이성적 사고와 객관적 판단에 따라 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연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도 완벽한 객관성이란 없다. 저자는 ’ 창조론자‘들을 예를 들어 이를 설득한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라는 틀에 맞추어 자신의 과학적 방법론을 펼친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들은 이성적 바탕에서만 판단한다고 생각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인해 입사를 거부당했던 사실, 토머스 영의 사상이 아이작 뉴턴의 사상과 상반된다는 이유로 저항에 부딪혔던 역사를 돌아볼 때, 과학계에도 소위 차별과 선입견이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이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발전했다는 가설 역시도 그 토대가 모호하다.      


백신의 개발이 과학적 방법이 아닌 우연의 중복으로 개발되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역시나 방법론에서는 프롤레마이오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 로버트 보일이 거듭되는 실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확인되지 않은 자신의 신념뿐이었으며,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그가 죽을 때까지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과학이 결코 과학적 방법만으로 발전해 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연과 확고한 신념, 즉 믿음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인류 역사에 있어서 과학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영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그것은 거의 결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물리학자 알랭 아스페가 ’ 네이처‘에 쓴 글, 즉 ”철학적 결론은 논리보다는 오히려 취향의 문제”라고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던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은 틀림없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아직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한다.”라고 했을 때의 그 ‘내면의 목소리’란 이성이 아닌 분명 믿음의 목소리이다. 물론 그 믿음은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믿음이다.     


이성이 도덕을 결정할 수 있는가?

저자는 샘 해리스가 ’ 도덕의 전망‘이란 책에서 ”도덕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두고 귀납적으로 주어진다 “라고 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비판한다. 첫째, 도덕에는 보편적 동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과학은 우리가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 줄 수 없다. 둘째, 고통, 스트레스, 기쁨, 아동 발달 과정, 건강한 인지 등에서 과학은 윤리학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도덕 자체를 결정할 수 없다. 셋째, 좋지 않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은 분명 다르다. 좋지 않은 것은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으나 옳지 않은 것에 대해 과학은 어떤 이야기도 해 줄 수 없다.      


마이클 셔머는 ’ 도덕의 궤적’이라는 책에서 ”인류는 종의 역사에서 가장 도덕적인 시기를 살고 있다 “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 안녕‘과 ’ 도덕’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판이다. 이에 대해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교수는 한 인터넷 칼럼에서 사람들이 자신과 무관한 제삼자의 특정한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오늘날 도덕성의 학제적 탐구에서 으뜸가는 미스터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중환 교수는 또한 도덕성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들을 리뷰한 한 논문을 인용하며, ”도덕적 질책과 그에 따른 수많은 인간 행동을 야기하는 인지 체계의 기능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연구가 행해져야 함은 명백하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와 연관하여 조너선 하이트가 그의 책 ’ 바른 마음’에서 한 다음 같은 질문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다. 도덕은 결코 이성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가서 생닭을 산다. 그런데 닭을 요리하기에 앞서 그는 닭에 대고 성행위를 한다. 그러고 난 후 그것을 요리해서 먹는다. (...) 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른다. 액면으로는 그저 자원을 나름의 용도에 맞추어 재활용(연구에 참여한 피험자 몇몇 표현이었다)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구토할 것 같은 기분은 이번 이야기에서 훨씬 강하게 드는 데다 이런 행동은 뭐랄까, 너무도 상스럽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행동은 잘못된 것일까? “      


반면 번지 점프나 스카이다이빙, 고층 빌딩 오르기를 포함한 위험한 스포츠 등이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위험한 일을 재미로 감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고 무모하다는 말을 할망정 그들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왜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만 비도덕적이라고 욕하는 보편성을 띠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진화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 이기주의를 통한 이타주의의 달성‘의 이론에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사례가 바로 ’ 근친상간‘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주장 중, 가까운 혈연과 성관계하여 낳은 자식은 치명적인 유전병을 지닐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자신의 짝짓기 상대로 가까운 혈연을 기피하는 심리 기제가 자연선택 때문에 진화하였다는 이론이 있다. 이에 대해 진화심리학자 커즈반과 드치올리는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만약 우리의 도덕 판단이 자기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심리 기제라면 그것은 너무나 부실하고 형편없다는 것이다. 나와 무관한 친남매가 하는 성관계를 내가 내 친남매와 하는 성관계하는 장면으로 혼동하는 심리적 기제가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 발달해 왔다는 이론은 형이상학적 가설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주의에 대하여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유시민 작가는 과거 제사장의 역할을 오늘날 과학자들이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명백히 역설적 수사법이다. 즉, 증거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신념은 실험과 실증에 의해서 탄생한다고 믿고 있는 과학주의적 과학자들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다. 제대로 된 과학자들은 자신의 증거와 실험 결과를 맹신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도 이 책에서 과학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들은 이성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과도하게 주장할뿐더러, 이성이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이해에 기초하여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 증거 중심의 경험주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결과는 대단히 부당한 지적 토지 수탈인데, 그 안에서는 모든 의미 있는 담론이 과학이라고 주장되고 그 외 다른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완전히 소탕된다. “     


저자의 이 말에 따르면 과학 주의자들에 있어서 과학은 제사장이 아니라 악덕 제후와 같은 존재다. 과학은 자신이 투신하고 있는 학문의 장원에 있는 모든 땅과 권한을 흡수한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해리스의 말을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는 도덕에 인간의 안녕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인간의 안녕은 두뇌의 생리작용에서 출발하며, 그러므로 두뇌에 실제로 적용되는 어떤 정신 물리학적 법칙에 건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이 잠재적으로 과학의 틀 안에 있다는 것 또한 잘 안다. “     


우선 해리스의 주장에서 ’ 관련된 무언가 ‘라는 말 자체를 특정할 수 없을뿐더러 과학이 도덕에 영향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도덕 그 자체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가 해리스를 반박하는 논거이다. 예를 들어 아동 발달, 건강한 정서적 삶, 건강한 인지, 그리고 아이들이 능력 있는 성인이 되기 위해 갖추게 될 것들에 대한 지식은 과학으로부터 취득할 수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성인이 된 자의 윤리적 삶을 결정할 수는 없다. 또한, 오락에서 얻는 즐거움과 쇼팽을 연주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대답 역시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다.     


스티븐 핑커가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을 통해 인류사의 ’ 안녕의 발전’을 ’ 도덕의 발전’으로 혼돈했던 것 역시 줄리언 바지니의 시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과 한낱 의견에 불과한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저자는 도덕의 원칙이 과학의 원칙과 동일한 지위를 가지지 않을뿐더러 ”도덕적 판단을 위한 알고리즘은 없다 “라고 단언한다.      


오래전부터 가톨릭에서는 낙태 금지를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낙태 금제에 대한 법제화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낙태 금지를 법제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의 범위를 특정해야 한다. ‘생명의 시점’에 대해서는 가톨릭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결국, 가톨릭은 과학적 논리와 절충하여 낙태에 해당하는 시점을 특정했다.      


오늘날 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14일이 될 때까지 태아는 궁극적으로 신경계로 발전하게 될 전구체조차 형성되지 못하며, 5개월이 될 때까지는 주된 신경계는 기본적인 생체 기능도 통제하지 못하고, 의식도 없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보는 생명의 시점과 과학이 증명해 낸 생명의 기준이 꼭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저자는 ’ 진화 윤리학‘에 대해서도 ”우리가 하고 싶도록 진화되어 온 것만을 할 수 있다고 우기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며, 윤리가 진화론에서 배울 것이 많기는 해도 순전히 과학적인 윤리학은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줄리언 바지니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이성적인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이성에 대한 의심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이성에 대한 네 가지 신화, 즉 이성은 전적으로 객관적이어서 어떠한 주관적 판단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신화, 이성이 우리에게 최고의 지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화, 이성이 우리가 행동할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한다는 신화, 완벽하게 이상적인 원칙 위에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신화는 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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