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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04. 2018

‘유물론’ 존재를 찾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유물론

“유물론은 대단히 통이 큰 개념이다. 유물론의 관심사는 정신-신체 문제부터 과연 국가는 일차적으로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유물론은 신에 대한 부정을 뜻할 수도 있고, 중국 만리장성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발목이 서로 은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아무도 금문교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금문교는 계속 존재한다는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물론은 일상적인 의미도 지니며, 그 의미는 전혀 철학적이지 않다. 대다수 사람에게 유물론은 물질적 부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그의 책 ‘신을 옹호하다’에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도킨스나 히친스와 같은 급진적 무신론자들을 비판했다. “하나님에 대한 도킨스의 증오는 선입견을 떨쳐버린 과학자의 냉정한 관점이 아니다. 실상 그런 관점은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다. 그의 증오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의 산물이다.”라고 이야기했던 테리 이글턴은 이 책 ‘유물론’에서 그 ‘문화적 맥락’이 바로 ‘유물론’ 임을 한다.


이 책(유물론)에는 다양한 유물론이 거론된다. 문화적 유물론, 의미론적 유물론, 생기론적 유물론, 사변적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들이 그러한 유물론들이다. 테리 이글턴은 그러면서 자신의 관심은 역사적 유물론과 일련의 관계가 있는 ‘신체적 유물론’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마땅히 품어야 할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인간의 코에 대해서 언급한 철학자가 왜 이제껏 아무도 없을까?”“라고 한 니체의 질문을 시작으로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프로이트의 사상 속에 들어있는 ‘신체적 유물론’을 집요하게 끄집어낸다.     


여기서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신체적 유물론’은 한마디로 인간은 언어, 역사, 유전, 친족, 사회제도 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바 ‘유물론’은 결코 정신이나 영혼, 그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저자는 인간이 물질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물의 하나이지만 동물과는 확연히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른데,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 기능, 즉 영혼이라 믿어지는 것들 역시 이러한 신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신체적 유물론’의 정의이다.     


”사람이 구스베리나 삼 같은 물질 덩어리와 다르다면, 그것은 사람의 내부에 어떤 신비로운 항목이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매우 특수한 유형의 물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      


저자에 따르면 특수한 유형의 물질 덩어리는 특수한 정신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체적 유물론’에 있어서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나타내는 다른 이름은 거론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신체를 보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신은 타인의 슬픔이나 분노를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타인의 영혼을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타인의 슬픔이나 분노를 보는 것이 곧 그의 영혼을 보는 것이다. “     


테리 이글턴은 웃기, 농담하기, 춤추기, 섹스하기, 틴 휘슬 연주하기, 엄청나게 비싼 그릇 수집하기,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기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활동들은 그 활동 이외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활동은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는 활동들이다.     


이러한 인간 활동이 도구적이지 않고 자체 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말에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로 직장 상사의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 크게 웃고, 길게 웃는다.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농담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외우기까지 한다. 아이돌 그룹이 방송에서 추는 춤은 인기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목적 자체도 사회적 반응이자 신체적 욕구에 기인한다. 그러니 돌아서 선 자리에 또다시 ‘신체적 유물론’이 존재한다. 이성이 이끄는 여행의 종착지에 신체적 감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원천이 감각적 삶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데, 테리 이글턴은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못을 박는다.     


”자신의 원천이 감각적 삶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은 애당초 제대로 된 이성일 수 없다. 인간 특유의 이성은 살의 필요와 제약에 반응하는 이성이다. “           


한편 마르크스주의자인 저자는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 사회적 활동과 의미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사회적 존재는 의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이 사회적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논점을 향한 시위를 당긴다.


”애당초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의미, 가치, 판단, 의도, 해석은 사회적 활동과 별개가 아니다. 정반대로 의미, 가치, 판단, 의도, 해석이 없으면 사회적 활동은 있을 수 없다. “      


‘신체적 유물론’은 인간의 심리와 정신을 다룬 지그문트 프로이트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인간의 근원적인 무력함은 (...) 모든 도덕적 동기의 주요 원천이다.”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우리의 도덕성이 자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취약성에 기인한다는 것으로서 결국 정신은 신체의 조건과 한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육체와 물질을 경시하는 영지주의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오늘날 심리 상담사가 내방자의 가족 관계를 분석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그리고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 억압기재를 파악하는 것 또한 그의 ‘신체적’ 제약 조건들을 파악함으로써 유물적 배경이 환자의 심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내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결국 심리학적 치료의 행위 역시도 ‘신체적 유물론’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테리 이글턴

철학의 문제로 눈을 돌린 저자는 마르크스와 니체가 정치적으로는 상반된 입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두 사람 다 고귀한 것이 저속한 것에 기원을 둔다는 점에 동의함을 들어 같은 유물론자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첫 번째 논거는 바로 권력에 대한 해석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계급사회에서 앎은 주로 권력에 봉사하지만, 니체의 시각에서는 권력에 봉사하는 앎의 역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니체, 두 사람의 중심 주제는 모두 ‘권력’이다. 마르크스가 평범한 사람을 옹호한 반면 니체는 평범한 사람을 채찍질했다고 주장한 저자는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혼이란 몸에 관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단어일 뿐이다 “라고 한 말을 그 증거로 들이민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삶 자체가 본질적으로 더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해치기, 지배하기이다. 그런 타자를 억누르기, 무자비하게 다루기, 지배자 자신의 형태로 만들기, 합병하기, 최소한 착취하기다. “     


두 번째로 저자는 마르크스나 니체 모두 관념론의 위로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를 역사적 유물론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사상은 역사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라는 것이다. 즉 저자에 따르면 ”인류 역사란 대체로 폭력과 분쟁과 억압의 피로 물든 이야기”라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견해이다. 두 사람 간의 차이가 있다면 마르크스가 이를 ‘필연’의 관점에서 분석해 냈다면 니체는 ‘우연의 섬뜩한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어떨까?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에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하기 방식과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 비판 사이에는 뚜렷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실제 삶과 언어 간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는 자연의 몇몇 사실들에, 특히 우리의 신체적 형태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오직 자신들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고, 프로이트의 사상에서도 고된 인간 정신 분석의 노동은 대부분 환자 자신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만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일련의 농담, 이미지, 일화, 감탄사, 반어적 의문,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 단편적인 대화와 대답 없는 화두처럼 제시되어 독자가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유일하게 옳은 철학하기 방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는 것이다. (...) 나는 그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행하지만, 언명하기를 꺼리는 바를 주목하게 만든다. “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은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 자신은 ‘신체적 존재’가 바로 그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저자의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김미루와 포스트모던 유물론

2012년에 김용옥 교수의 딸이자 행위 예술가인 김미루는 돼지와의 104시간 같이 하는 누드 퍼포먼스를 벌였다. 김미루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돼지와 살을 맞닿음으로써 돼지를 온전하게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느끼고 싶었다면 그녀는 굳이 퍼포먼스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퍼포먼스란 무언가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하는데, 김미루의 퍼포먼스에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퍼포먼스에 대해 적절한 설명도 하지 못한다.

 

김미루가 돼지와 104시간 같이 했던 누드 퍼포먼스 (Miru Kim 홈페이지)

김미루가 인간과 돼지가 같은 사육장 안에서 위하감 없이 섞이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과 돼지가 얼마나 유사한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면 그녀의 퍼포먼스는 실패작이다. 이 퍼포먼스 속에서는 돼지와 인간은 절대로 섞일 수 없다는 메시지만 보이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역시도 포스트모던 유물론(생기론적 유물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특권을 경계한 나머지 일종의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물질 자체를 다원화하는 위험을 감수한다고 비판했다. 인간이 모든 생물들과 똑같은 생식 법칙의 대상인 생물학적 종이라고 해도 인간과 돼지는 엄연히 다른 물질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고난을 느끼는 물질이지만 돼지는 고통을 느끼는 물질이다.)       


김미루와 같은 무모한 생기론적 유물론자들은 절대 주권적인 주체를 물질적 힘들의 그물망으로 분산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그 힘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때때로 사람이 온갖 규정들로부터 마법적으로 자유롭지는 않더라도 자율적 행위자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미루의 이런 퍼포먼스가 주는 메시지는 그냥 ‘이상함’ 뿐이다.  

인간과 돼지의 피부 (Miru Kim  홈페이지)

오르가슴과 사랑

마리 로쉬(Mary Roach) 박사가 오르가슴에 대해 한 TED 강연은 유명하다. 이 강연은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강연에서 그녀는 오르가슴은 ‘자율신경계의 반사작용’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오르가슴의 다양성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먼저 여기서 '자율신경계의 작용'이란 우리가 의도적으로, 즉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작용을 말한다.     


그녀는 눈썹을 쓰다듬는 자극에 의해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 칫솔질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을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중추 마비로 인해 일부 신체의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의 경우도 마비된 신체의 바로 위에 있는 부분의 민감도가 대폭 증대되면서 그 부분으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공개하기도 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위 ‘나사로 반사신경’이라고 하는 것인데, 심장이 멈추고 뇌파만 살아있는 사람의 ‘천골 신경’을 자극하면 그 사람도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것이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느낀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히포크라테스로부터 1950년대까지는 여성의 오르가슴은 임신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실험에서 이러한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다. 반면 돼지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에서는 오르가슴이 약 6%까지 임신율을 높일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고도 했다. 최소한 인간에게 있어서 오르가슴은 도구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최근 뉴스에서 섹스 토이에 대한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수년 전 가장 안전하고 촉감이 좋은 콘돔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는 아이디어 공모를 내기도 했다. 모두 오르가슴을 위한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마리 로쉬 박사에 따르면 오르가슴은 확실히 동작이고 자극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행동과 자극을 통해 통제 불가능한 반사 동작을 끌어내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은 어떠한가? 비트겐슈타인은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라고 도발적으로 못을 박았다. 사랑은 마치 통증처럼 8초 동안만 느끼고 마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오르가슴이 아니다. 그리고 유물론자 테리 이글턴도 이 말에 동의한다.      


‘신체적 유물론자’ 테리 이글턴이 기독교 사랑이 왜 유물론적인지를, 아니 유물론적이어야 하는지를 다음의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믿는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두 몸의 성적인 결합은 신의 왕국을 미리 맛보게 한다. 성령은 어떤 성스러운 유령이 아니라 세상을 부수고 변형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신앙은 외톨이 정신 상태가 아니라 교회라는 실천적 공동체적 삶 꼴에 동참하는 것에서 유래하는 확신이다. 고결한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흔해 빠진 삶과 밀교 적 사상을 경쟁시키고 낮은 자를 드높이고 강한 자를 권좌에서 쓰러뜨리는 어리석음, 카니발 같은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이론적 명제들의 집합이 아니라 죽음에 뛰어들기. (...) 기독교의 중심에는 부자와 권력자를 맹비난하고 사기꾼과 창녀와 어울리는 하찮은 예수가 있다. 그는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엘리트 성직자와 정치가에게는 손톱 밑의 가시와 같기 때문에 결국 그는 로마 제국의 권력이 정치적 반역자에게 내리는 끔찍한 사형을 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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