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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11. 2018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을 찾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What's It All About?: Philosophy and the Meaning of Life

줄리언 바지니가 2004년에 처음으로 출판한 이 책의 원제목은 ‘What's It All About?: Philosophy and the Meaning of Life’다. 한국에는 2011년 ‘빅 퀘스천’이란 이름으로 처음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2017년에 ‘러셀 교수님, 인생의 의미가 도대체 뭔가요?’라는 긴 이름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첫 번째로 번역된 이름은 아마도 인생의 의미를 묻는 거대 질문이란 뜻일 것이고, 두 번째 번역서의 제목은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인용한 택시 기사가 러셀 교수에게 한 질문에서 따 것이다. 이렇게 번역서의 제목이 에둘러진 이름으로 작명된 이유는 ‘What It All About?’이란 원제를 해석해 낼 적당한 문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2004년에서 2011년을 거쳐 2017년에 이르기까지 줄리언 바지니가 쓴 책들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의식의 흐름, 생각의 변화를 감지해 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2018년 현재 시점에서 2004년에 처음 쓰인 책을 읽는 순간, 줄리언 바지니가 어렵게 기어 올라온 생각의 절벽 아래로 다시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다.     


이 책을 읽은 느낌. 우선 형식적으로는 배신감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책을 굳이 다시 출판하는 것도 그렇지만, 2011년 ’빅 퀘스천‘이란 이름으로 이미 출판된 책을 이름을 바꾸어 재출판한 것은 백 퍼센트 출판사의 얄팍한 상술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름 바꿔 재출판하기’는 한국 출판계에서 종종 보는 현상이다.     


이러한 ‘이름 바꿔 재출판하기‘는 한국의 인문학 지식과 도서의 생산성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의 인문학 토대, 유시민 작가의 책이 나오는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제목이 ’빅 퀘스천‘이던 ‘러셀 교수님 어쩌고 저쩌고’이던 책의 내용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한편, 책이 꾸준히 판매되고 있기에 출판사가 이런 꼼수를 부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든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던 2004년이나 한국에 처음 번역되었던 2011년,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재출판되었던 2017년이나 전 세계를 뒤흔드는 인문학계의 공통된 현상이 있다면, 삶의 의미나 인생의 목적을 논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반기독교적 논리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서양의 지식사와 교양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미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세계관, 가치관을 넘지 않고서는 새로운 지적 세계로 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삶의 의미를 거론하는 것인지,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피터 왓슨은 자신의 책, ‘무신론자의 시대’에서 “신에 대한 믿음에 필적하는 세속의 대응물은 (...) 인간 공동체와 그 발전 과정을 신뢰하는 것, 즉 다양한 인식적 포부와 도덕적 희망이 있으리라는 전망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전자에 동의하고 있다.     


이 책 역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14년 전 줄리언 바지니의 기독교 비판의 도구로 사용된 것은 어설픈 ’ 무신론적 이성‘인 듯하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2018년의 바지니는 여전히 무신론자이지만 결코 이성주의자는 아니다. 기독교적 인생관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저자는 2018년 현재는 ’ 이성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도감은 바로 그 변화에 있었다.


반면 마이클 셔머, 스티븐 핑거, 다니엘 데닛, 도킨스와 히친스 등과 같은 무신론자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편견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그들의 비판하는 기독교는 솔직히 생소하다. 테리 이글턴은 이를 두고 ’ 기독교라는 허수아비’라고 표현했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그들의 허상이 만들어 낸 허수아비에 대고 칼질을 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의 반기독교적 지적 활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누가 뭐래도 기독교 자체에 있다. 자산 덩어리가 된 교회를 세습하면서도 그것이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목사, 절차적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담임 목사직을 철회해야 한다고 법원의 판결을 두고 법이 종교에 간섭한다고 버티고 있는 교회까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을 제시할 자격도 여유도 없다. 슈바이처의 말처럼 예수는 달리는 대형 교회의 바퀴 밑에서 매일같이 깔려 죽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여 기독교 본질을 섣불리 판단하고, 일반화하고, 공격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무신론자들의 말대로 교회는 기독교의 원리와 심장과 그 맥박에 대해 잘못 가르쳐 왔기에 먼저 교회가 잘못 가르친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 게으르고 성급하다. 마치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와 같아 보인다.      


예를 들자면, 이 책에서 저자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복음 10:10)라는 성경 속, 예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 생명‘에 대해, “도대체 어느 누가 인간이 생명을 얻지 말아야 하고, 충만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신경질적으로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예수가 이야기하는 생명의 의미, 충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부터 나오는 엉뚱한 칼질이다.      


“삶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 삶의 목적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 프랑켄슈타인’을 등장시키는데, 삶의 기원을 ’ 프랑켄슈타인 탄생의 비밀’로 설명한 것 역시나 적절하지 못하다. 변태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으로부터 어떤 경이로움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아이의 출생 장면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탄생 장면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경외다. 그러한 보편적 감각이 생명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런 생명에의 경외감이 바로 충만의 의미이다.     


“삶의 기원은 삶의 목적을 설명해 줄 수 없다.” 저자는 창조주의 목적이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의 창조 행위가 인간의 목적을 방해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강압적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이야기 한 신의 언어가 곧 신의 자기 충족적이고 심미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이 화해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따른다고 해도 우리가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라면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목적 지향적 삶 자체가 결국 현재를 팔아서 미래를 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 사용 가치’라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으로 반박한다. 그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모든 가치는 사용 가치에 집중되어야 하며, 그것을 벗어날 경우, 노동이 소외되듯 삶 역시도 소외될 수 있다고 했다. 줄리언 바지니의 ‘현재에 충실한 삶’과 테리 이글턴의 ‘사용 가치로서의 삶’의 사이에는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삶과 행복을 위한 ‘도구적 기능’으로서의 삶이라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목적은 사르트르의 ‘종이칼’과 같은 것이 아니다. 편지지는 종이 칼이 아닌 날카로운 돌조각으로도 찢을 수 있으나, 인간과 생명 사이에 있는 관계의 문제는 돌을 칼로, 칼을 돌로 간주할 수 있는 도구적 임시방편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목적은 철저히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예수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 ‘하늘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줄리언 바지니가 오해하듯 내세를 전제로 하는 인생관이 아니다.


줄리언 바지니는 ‘현 사실성의 수용’을 가지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문제’를 대체하려고 시도했는데,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의 사상은 다르다. 고통은 사랑에서 비롯되는데,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필연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에 대해 테리 이글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는 아무 이유 없는 공짜 선물이며, 세계 위에는 늘 세계 자신의 비존재 가능성이 그늘로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우주는 어떤 특수한 항목이 아니라 이 같은 우주 자체의 ‘이유 없는 공짜임’ 이 우주의 창조자를 암시한다. 우주는 숙명이 아니라 선물이다. 전문적인 신학 용어로 말하면, 신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재미로, 신 자신에게서 느끼는 영원한 기쁨과 만족에 이끌려, 마치 화가가 그림을 생산하듯이, 우주를 창조했다.”      


당연히 예술도 인간 실존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도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은 오직 확고하고 명쾌하게 예술 자체의 심미적 관점에 초점을 맞출 때만 그런 도구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술의 의미와 가치는 실제 예술 활동과 분리될 때, 그 도구적 기능도 잃어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따르면 이러한 예술의 관점은 덕의 실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인생에 주어진 고유한 목적은 없다. 창조적이고 창발적 목적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창조된 목적이 신의 심미적 영역에 부합되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앙이라 부른다. 한편 인생은 선물이기에 어떤 의미도 가질 필요가 없다. 단지 가치 있는 의미는 따로 구분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는 아무 때나 공을 찰 수 있지만, 그것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정해진 규격의 운동장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공을 차는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가 동네 축구보다 위대한 이유이다.     


우리를 구속하는 억압이 없을 때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중력 상태에서 우리는 더욱 부자유스럽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적 힘에 내부적 의지가 적응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는 행복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를 밝힌다.      


“행복의 가장 큰 장애물은 어쩌면 행복에 대한 현대의 신화 자체일 것이다. 행복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으면, 다른 사람들이 타당하게 바라보는 것 이상을 가져도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라고 이야기 한 저자는 행복이란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즉 행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찾아온다고 주장하면서 “구하라 그리하면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로 기독교를 조롱한다. 이 역시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행복)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된 주장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 카르페 디엠‘, 인생의 성공, 더 큰 이익, 헌신, 무의미의 추구, 사랑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행복과 삶의 가치에 대해 하나하나 그 위험성을 지적한 저자는 결국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일 수 없다고 성급하게 결론짓는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자신의 결론에 대해 확신이 없음을 시인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에 책을 마무리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다. 이제 작가들은 타자기 앞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 끝’이라고 자판을 누르면서 책을 끝맺지 않는다. 오늘날 작가들은 마지막이라고 결정하면 마우스를 클릭해 저장하고 끝낸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 같은 주재를, 어떻게 말하고 모든 것을 다 다루었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예수가 말하는 삶의 의미하늘나라

예수는 “하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라는 말로 자신의 공생애의 첫 설교를 시작하였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자에게는 늘 비유로 대답을 하였는데, 이것은 듣는 자들이 스스로 찾아야 할 답이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표현에 따르자면 “귀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개개인 삶의 의미이자 각기 다른 인생의 창발적 목적이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하늘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남은 것들은 내 버린다.”(마태복음 13:44~48)     


이 글에서 ‘하늘나라’는 그대로 ‘삶의 의미’, 또는 ‘인생의 목표’로 대체될 수 있다. 나머지 모든 것을 팔아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다. 예를 들어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돈은 돈 이외의 모든 것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지 돈 자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 왓슨은 이를 “우리가 기꺼이 무한히 되돌아가 계속해서 살고 싶어 질 그러한 순간들만을 위한 선택”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밭에서 발견한 보물이고, 모든 것을 팔아서 얻어야 할 진주이며, 선별된 물고기가 될 수 있을까?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나 목적을 제시하지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귀와 눈을 가지라고 할 뿐이다.      


그러니 신의 목적을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라고 한 저자의 말은 그야말로 ‘기독교라는 허수아비’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허상들은 비단 줄리언 바지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대부분 무신론자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무지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러한 무지의 주범은 결국 교회이다.     


교회는 많은 기독인에게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표를 가르치는 대신, 오히려 기독인들을 종교 중독으로 이끌었다. 어떤 측면에서 이 종교 중독은 마약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해롭다. 앞에서 언급한 대형 교회 목회자의 범죄 행위, 사기적 작태가 용인되는 가장 큰 힘은 대다수 교인이 이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목회자 아내의 신앙 사춘기

뉴스앤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정신실이라 이름의 작가이자 목회자의 아내가 쓴 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목회자의 아내가 된 후, 10여 년간을 어두운 신앙 사춘기를 경험했고, 이때의 경험을 10회에 나누어 기고했다. 이 기고에서 그녀는 쉐일라 파브리칸트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 중독’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중독이 우리의 삶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현실, 특히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실체 또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내면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어떤 것을 피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외부적인 어떤 것을 사용한다. 중독의 목적은 자신과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나 인생의 목적이 신이 미리 설정해 놓은 길을 맹목적으로 걷는 것이라는 줄리언 바지니의 오해가 오해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한국 교회가 이미 깊은 중독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교인들이 예수를 통해 열린 귀, 떠진 눈으로 각자의 올바른 인생의 목적을 찾게 인도하는 대신, 그저 내면의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실제로 ‘기독교의 허수아비’는 허상이 아닌 실존하는 기독교의 우상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에 정신실 작가는 스캇 펙 박사의 ‘개인적 정화’를 인용한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에 따라 자신을 정화하는 일이 각 개인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 정화는 각 개인의 영혼 구원뿐 아니라 그들이 속한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터득할 것이다."     


서른 중반에 줄리언 바지니가 쓴 이 책에서도 지적 사춘기가 느껴진다. 지적 사춘기든 신앙의 사춘기든 우리가 넘어야 할 사춘기는 존재한다. 이 사춘기를 넘어가면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저자의 다음 글은 주체적 삶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처절한 싸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이 집단적 사춘기를 앓고 있는 것 같다. 분노하고 냉소하며 사기꾼 목사 색출과 퇴출에 목숨을 거는 사람. 교회 봉사한다고 복 받는 것 아님을 알았으니, 에라, 교회는 팽개치고 여행이나 다니고 몸이나 가꾸며 거침없이 누리기로 작정한 사람. 사회적 하나님에 눈을 떠 부흥 집회 대신 시국 집회와 시위에 열정을 쏟는 사람. '아이고, 의미 없다'라며 무기력 병에 걸린 사람. 자기 욕망이 아니라 목사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니 이제라도 자기답게 살겠다며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감정과 욕망을 분출하는 사람. 가려운 곳 딱딱 긁어 주는 신학, 거침없이 욕해 주는 사이다 성경 공부에 매료되어 학구열을 불태우는 사람.     


각자 나름대로 다리 덜덜 떨며 사춘기의 숲을 헤매는 것 같다. 사춘기 교인은 넘쳐 나는데 목회자들은 아직 중고등부는커녕 유치부에나 먹힐 설교와 가르침을 내놓고 있다. 교인들은 신앙의 실존 앞에 알몸으로 섰는데, 에덴동산 그림 한 장 들고 "여러분, 세상은 누가 만드셨죠?" 하며 설교하는 형국이다.     


사춘기는 못 배워 무식하고, 가난하고, 말 안 통하고, 성질 사나운 부모를 '쪽팔려' 하며 시작하기도 한다. 그 부모와 맞서다 주먹으로 벽을 치고, 몰래 담배를 피우며 일탈도 하고 결국 부모라는 산을 넘어서 어른이 된다. 정신 제대로 박힌 교인들을 사춘기 광야로 내몬 범죄자에 위선자 목사들의 죄를 가벼이 여길 뜻은 없다. 받아야 할 죗값이 있다면 끝까지 받도록 하고, 어설픈 용서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와 나를 한데 묶어 빠르게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에 태우지는 않을 것이다.     


내 엄마와 연결되었던 탯줄이 잘리며 태아에서 신생아로 세상에 나왔다. 사춘기 아이에서 청년이 되고, 딸에서 아내가 되고, 딸에서 엄마가 되는 생의 전환점마다 다시 끊고 또 끊어야 했던 것이 엄마와 연결된 끈이다. 떠나고 또 떠나와 지금 여기에 섰다. 그렇게 떠나온 덕에 노년의 엄마를 투명한 애정으로 돌볼 힘이 생겼다. 한때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고, 미워서 맞서고 대적했던 내 엄마다. 이렇듯 영적 부모, 영적 고향인 목사와 교회를 떠나고 넘어서며 더 깊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신앙 사춘기를 넘어. 정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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