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인순 Dec 23. 2018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책 속의 사람들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기호학자가 세상을 왜 들여다 보나? 움베르토 에코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정치적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나름대로의 안경으로 세상을 들여다 보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유럽식 정치이며, 도덕적 의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의 신념을 받아들인다면 그 다음으로 알고 싶은 것은 그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정치 방식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가 말하는 역사에 대한 해석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코의 정치적 행위를 분명히 하려는 시도, 또는 그가 세상을 들여다 보는 방식의 이해에는 먼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세상에 대한 선행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세상에 대한 검토는 그 시대의 어깨가 되어준 역사, 즉 20세기의 시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코가 태어나기 30년전, 정확히는 1903년, 인도에서는 영국인 조지 오엘이 태어났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역사적 종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참혹한 모습으로 끝이 난 그 해에, 이튼 칼리지를 졸업했다. 오웰이 대학을 들어가야 할 그 시기에 그의 대학 선배가 되었어야 할 젊은이들 중 1/3은 이미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지의 제왕’을 쓴 영국인 학자 톨킨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옥스포드의 ‘이글 엔 차일드’를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솜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그의 친구 C.S. 루이스가 돌아와 ‘나니아 연대기’를 쓰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비트겐슈타인은 연맹국 전사로 참전하여 그의 조국을 위해 전투에 참가했고, 이탈리아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간현상’을 쓴 프랑스인 신부 떼아르 드 샤르뎅도 참전하여 간호병의 역할을 다하다 돌아왔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참전하지 않은 천재 철학자 독일인 하이데거는 전후, 다시 소집되어 전선에 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잊혀진 자들은 잊혀 진대로, 돌아온 젊은이들은 돌아 온대로 그렇게 유럽의 상처가 아물고 있을 무렵인 1932년, 이탈리아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태어났다. 그가 8살 되던 해에 또다시 2차대전이 발생했지만 유년기의 전쟁을 겪은 세대가 늘 그렇듯이 전쟁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세상에 대한 구체성은 전후 세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돌이켜 보면 유럽에 있어서 20세기의 전반부는 전쟁의 시기이고, 에코가 살았던 후반부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에 앞서 조지 오웰의 이야기를 꺼낸 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웰 역시 에코와 마찬가지로 “왜 글을 쓰는가?”, 즉 “왜 세상을 들여다 보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늘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오웰이 말하기를 왜 나는 글을 쓰는가? 첫째, 순전한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둘째, 그는 미학적 열정으로 쓴다고 했다.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그 인식은 그가 글을 쓰는 의미가 되고 목적이 된다. 셋째,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충동, 즉 역사적 충동을 위해 쓴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웰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쓴다고 했으며, 여기서 그는 정치적이란 말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정치적 목적이 바로 세상을 들여다 보는 이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사유이며, 이것은 오웰이나 에코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 자신도 이 책의 서문에 이를 명확히 했다.


 다른 그림 찾기와 닮은 그림 찾기  

 움베르토 에코는 1960년 이후의 세계, 즉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중세를 닮아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의 근거로 몇 가지 현상들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현상적 증거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모호한 종말론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가 팍스 아메리카의 붕괴에 이은 ‘베트남화’라고 지칭한 사적인 구역의 공고화는 봉건 사회를 닮아있다. 산업의 발달이 몰고 온 환경의 파괴는 인간에게 더욱 중요한 것을 결핍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교통의 발달이 새로운 유목 생활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로빈 훗의 숲과 비견될 수 있는 러스트 벨트는 위험한 지역이 되었고, 중세 성당의 화려한 그림과 채광은 오늘날 현란한 클럽의 조명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그렇다.


그는 “구조주의에서 보이는 형식주의로의 과도한 경사와 반 역사적인 경향은 중세의 스콜라철학 논쟁에서 나타났던 형식주의적 경향과 동일하다”라는 결정적 논리로19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가 중세를 닮아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의 세계가 중세의 일면을 닮아있다는 그의 생각에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전후 세대가 가지고 있는 한계, 즉 역사의 결핍을 발견하게 된다. 에코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후기 구조주의의 시대가 역사 결핍증을 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대에 역사는 치유의 대상이지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코가 의식하고 있었던 그렇지 못했던, 그것이 반 역사적인 경향의 구조적 배경이 된 것만을 사실이다. 무신론자 알랭 드 보통이 ‘무신론자들의 종교’라는 책에서 종교로부터 차용할 수 있는 사회적 유용성을 찾아내고자 하였는데, 이 ‘차용’이라는 단어를 빼면 움베르토 에코 역시도 비슷한 의도를 이 책 속에 숨기고 있다. 중세로부터 유용한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포스트모던의 가치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에 의심이 드는 것은 포스트모던과 중세에 대한 그의 비교는 중세의 성당 그림을 배경으로 하는 ‘같은 그림 찾기’와 같기 때문이다. ‘같은 그림 찾기’는 ‘다른 그림 찾기’에 비해 매우 어려운 놀이이다. 일반적인 ‘다른 그림 찾기’가 두 개의 그림 판에 그려진 동일한 그림에서 다른 모양을 찾는 것이 라면, 에코의 ‘다른 그림 찾기’는 두 개의 판에 그려진 다른 그림에서 동일한 주제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 하려면 모든 그림을 다 보아야 한다. 수도원과 대학, 교회와 디스코텍, 순례길과 비행 항로, 로빈 훗과 러스트 밸트, 기호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기표(Signifiant)에서 기의(Signifié)를 찾아야 하는 지류하고 정신적 소모가 큰 작업일 뿐만 아니라 오류도 많을 수 밖에 없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중세가 표방했던 세계는 형식적으로는 종말론적이었지만 실제로 중세를 지배했던 가치는 묵시론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연옥의 개념과 면벌부라는 종교적 제도이다. 중세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현재의 세계를 지배했다. 물론 이러한 지배, 즉 묵시론적 강압과 통제는 한국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소위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의 모습이다. ‘바로 여기’로 대변되는 종말론적 가치를 중세를 지배했던 가치였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종말론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또 하나의 예로는 아욱타리토스에 대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 에코는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걸터앉은 난쟁이와 같다”라는 베른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며, 중세의 학자들은 아욱토리타스만 있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멀리 보는데 있어서 거인의 어깨 위에 앉은 난쟁이의 역할보다 거인 자체의 아욱토리타스가 더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지기 뉴턴은 이에 대해서 다르게 표현했다. 그는 ‘거인의 어깨에 앉은’ 모습을 상상한 것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는’ 풍경을 그렸다. 중세가 현재를 받치고 있는 거인의 어깨라고 해도, 역사적 뉴턴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를 받치고 있는 것은 거인의 어깨가 아니라 우리의 건강한 두 다리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인공지능과 인지과학을 받치고 있는 굳건한 거인은 비트겐슈타인이고,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그리스의 파라메니데스의 어깨를 빌려 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인공지능과 인지과학의 학문적 권위가 그리스 철학에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구조주의가 중세의 형식주의를 닮았다고 했지만 최소한 후기 구조주의의 관심 주제는 매우 다양했다. 소쉬르가 언어로,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으로, 라캉이 심리학으로, 바르트가 문학으로 그 관심의 중심을 옮겨갔다. 수도원이 모으고 복제하는 곳이었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학과 연구소는 창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다른 사회를 보는 시각

움베르토 에코는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그 이유는 이 글을 통해 그가 새로운 사회, 또는 다른 사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밀랍인형에 대한 분석은 과히 압도적이다. “복제는 불멸이다”라고 말한 에코는 사실주의의 기호를 도구로 삼아 유전자 변이, 즉 진화(포스트모더니즘)와 역진화(중세) 사이의 갈등으로 미국 사회를 표현하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끌어낸다. 그가 역사적 공간 속에 밀랍 인형을 끼워 넣은 것은 그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밀랍 인형은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기표가 되는 것이다. 어떤 공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그 공간에서 살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밀랍 인형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실감나는 동작, 공간과의 합리적인 연계 설계로 세워놓는 것 만큼 공간을 잘 이해시킬 수 있는 기표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밀랍 인형의 역할은 가장 사실적일수록 즉 극사실적일수록 더 효과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에코가 미국의 극사실주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상황, 즉 ‘역진화 이전의 진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쇠퇴해 간 사실주의의 바통은 낭만주의를 거쳐 표현주의로 이어졌다. 최소한 움베르토 에코가 태어나기 전, 20세기의 유럽은 표현주의가 지배했고, 나치에 의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그 전통은 포스트모던의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 이후 미국에서는 모든 주관성을 배제한 극사실주의가 유행했고, 이는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서 마치 역진화와 같이 느껴졌을 수 있다. 그런 역진화성은 ‘새로운 중세’라는 해석을 낳게 했을 수 있다.


그러나 구스타프 크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의 표현주의 예술가들, 그리고 프로이드로부터 구스타프 칼 융에 이르기 까지 지식인으로 구성된 유럽의 세계는 외면 보다는 내면, 그리고 중세보다는 고대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이러한 20세기 초 유럽의 경향에 대한 영향권 안에 있는 유럽인이 미국의 극사실주의를 보는 충격이 클 수는 있었겠지만 이를 중세로의 지향에 대한 대표적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그 설명의 특수성이 부족하다. 가장 사실적이어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사실성을 제거하여야 그 때서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논의를 유보하겠지만 아무튼 미국의 극사실주의를 새로운 중세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미국의 극사실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환상과 환타지와, 영웅과, 신을 표현하려 하는 부분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확실히 극사실주의는 중세적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극사실주의적 잣대와 모방과 복제를 들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전통도 이러한 극사실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것이 단지 물리적으로 뚜렷이 만질 수 있는 형태만을 취하게 된다면 영혼의 영생불멸도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에코의 말은 이러한 우려와 두려움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에코는 “미국에서는 선과 아름다움, 예술, 동화 그리고 역사는 육화될 수는 없어도 최소한 플라스틱은 되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것은 플라스틱의 위력과 영향력을 간과한 표현이다.


밀랍 인형의 목적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진짜라고 느끼게 하는데 있기 때문이며, 미국에는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모든 물리적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미국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미국적 시각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회, 하나의 세계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더욱 위험하게, 시간을 더욱 미래적으로, 변화를 더욱 역동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다. 미국의 모든 것이 유럽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는 순간 세상 들여다 보기의 순수한 의도는 훼손되며 그 정치적 목적도 달성하기 어려워 진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이라는 주제로 ‘기호’의 문제를 거론했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상품’이라는 주제로 이를 다루고 있다. 그는 ‘상품’에 대해 “그것들은 무차별적인 욕망의 기호이지만 동시에 개별적이고 엄밀하게 규정된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라고 표현한다. 롤랑 바르트가 형이상학의 구조를 파헤쳤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형이하학의 세계를 분석한다. 상품은 곧 문화 상품으로 옮겨 가는데, 바로 공연에서 ‘부르는 자와 음악의 관계’를 ‘파는 자와 상품’의 관계로 대비시킨 것이다. 에코의 시각은 다시 문화 상품에서 컬트 무비로 건너간다.


“노래가 불쾌해져야 비로서 청중들은 행복해진다”라는 말로 음악에 있어서 시이퀀스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면서 이 또한 중세적 풍경임을 지적했는데, 이 부분에서 그는 기표가 범람하는 사회의 구조들을 조각 조각 내고, 그 각각의 조각들 속에서 중세와 닮은 점들을 찾아낸 후, 그 조각이 중세를 닮아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기표를 통한 기의의 전달구조에 대해서는 중요한 의문이 남는다. 인간의 인지 구조, 즉 정보의 전달은 결국 감각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레이 커즈와일에 의하면 인간이 인지하는 것 중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20%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 20%의 언어(기호)를 통해 세상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특히 밀랍 인형이나 컬트 무비, 그리고 전시장의 상품들을 토대로 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는 분명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는 세상을 어떤 자세로 들여다 보아야 하겠는가?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게 된다.


레이 커즈와일에 의하면 우리는 기억, 이야기, 패턴을 통해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들여다 본다”라는 말로 바꾸어도 전혀 문제없다.)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여자와 마주친 경험이든, 배우자를 처음 만난 순간처럼 좀더 의미 있는 서사가 담긴 경험이든, 기억은 모두 패턴의 나열로 저장된다. 이러한 패턴에는 단어나 소리나 그림이나 비디오로 된 첨부 파일이 달려있지 않다. 실제 이미지가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자 할 때, 우리는 마음속 저장된 패턴을 재구성해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에코에 있어서 포스트모던은 재구성된 이미지고, 중세는 마음속 저장된 패턴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그리스 사회  

 20세기 초의 신학은 누가 뭐래도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된다.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신학은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성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신학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표현된 책이자 인간 사회에 필요한 윤리적 원칙을 제공해 주는 책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은 바르트에게 인간의 이성의 토대가 얼마나 허무한지를 잘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는 1914년 8월의 어느 날을 깊은 어둠의 날로 기억한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빌헬름 2세와 그 추종자들의 전쟁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이 지성인들 속에 내가 크게 존경했던 모든 선생님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라고 말하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난 자리에는 루돌프 불투만과 폴 틸리히라는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20세기의 전반부를 잘 붙들고 있었다.


20세기 후반부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떼야르 드 샤르뎅, 칼 라너 등의 대 신학자들의 영향력은 점차 사라지고, 신학계는 어느 누구도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학은 그 개념이 확장되고 다양화 되었고, 텍스트보다는 텍스트 사이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교회성과 실천성이 강조되었고, 결국 여성 신학으로, 해방 신학과 흑인 신학으로, 과정 신학과 생태 신학 등으로, 신학은 색깔과 내용과 범주가 다양화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중세 신학을 닮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리스화 또는 고대화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글을 쓰는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끝까지 기다렸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 책을 쓴 정치적 목적은 무엇일까?. 실제로 에코의 정치적 목적이 드러나는 것은 책의 가장 마지막 장이다. 이 장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이 책을 쓰기 얼마 전, 즉 1978년 마리오 보레티가 이끄는 ‘붉은 여단’이라는 정치집단이 이탈리아 기독교 민주당의 알도 보르를 납치 살해한 사건을 다룬다. 그리고 사형 제도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한다.


에코는 이 글을 통해서 테러리즘과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 의견을 비교적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가 약속을 지킨 셈이다. 조지 오웰이 자신의 글을 역사에 던짐으로써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면 움베르토 에코는 역사의 구조를 들여다 보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다했다고 믿는 듯 하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웰과 에코의 의도가 한국에서도 유효할지 의문이다. 오늘날 K-POP과 촛불집회를 해석하는데 있어서의 중세적 가치가 무엇인가? 또는 그리스적 가치, 고대적 가치는 존재하는가? 촛불 집회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를 어떻게 발라내고 분석할 수 있을까? K-POP이라는 문화 상품의 기표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전달 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남북 분단 상황이라는 한반도의 정치적 구조는 어떻게 들여다 볼 것인가? 그런 질문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정치적 역할은 다 한 것이 아닌가?  


작가의 이전글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을 찾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