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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24. 2018

‘순수 박물관’ 사랑에 빠진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순수 박물관

쉰 살이 넘어 읽은 연애 소설 중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사건에 남겨진 아픔이 아니라 기억에 남겨진 아픔이다. 그래서 가장 진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평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스포일러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한번 꺼내 든 마약같은  몰입은  처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이 서평을 쓰는 데 있어서의 심리적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오르한 파묵이 쓴 낡은 연예 소설은 다소 구불거리지만, 기본적으로 평편한 포도와 같이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포도 아래에는 강물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의 슬픔은 이 강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강물을 그려내면 분명히 스포일러가 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강물은 가끔 포도를 뚫고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간다. 그래서 포도 위로 뚫고 올라온 강물만으로 서평을 쓰고자 한다.      


터키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가 쓴 이 책의 표지에는 독자들의 눈을 끌기 위해 쓰인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30년 동안 부유한 가정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온 케말의 인생에 퓌순이라는 아가씨가 나타난다. 아니, ‘나타났다’기보다는 ‘드러났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가씨는 자신의 먼 친척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이 소설의 시작 부분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퓌순은 한 달까지만 해도 내가 존재조차 거의 잊고 있던 열여덟 살의 가난한 먼 친척이었다. 나는 서른 살이었고, 모든 사람이 나와 잘 어울린다고 했던 시벨과 곧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할 참이었다.”라는 이 문장이 이 소설에서 말하는 ‘순수의 복잡성’을 예고해 주고 있다.     


책의 표지에 쓰인 문구처럼 퓌순이라는 한 여인에 대한 케말의 사랑은 44일 동안은 육체적으로, 339일간은 생각으로, 그리고 2864일간 기억을 통해 이어진다. 그리고 이 두 애달픈 연인들은 육체와 생각과 기억이 합쳐진 완전한 사랑과 행복 앞에 ‘좌절’되거나, 또는 ‘남겨’ 진다.      


소설의 전편에는 별장에서의 주인공과 퓌순의 육체적 사랑이 집중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이 육체적 사랑에 순수를 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신력을 쏟아부어 물질적 과정을 정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필사적인 작가의 설명은 결국 그들 사랑의 이야기가 결코 육체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결과물들은 그들이 거쳐 갔던, 특히 퓌순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들로 계속해서 별장에 남게 된다.     


포도 위로 올라온 강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만질 수 있는 사랑은 순수할 수 있다.’ ‘만질 수 없는 사랑은 순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닿을 수 없는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이 소설 속 강물에 대한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만 허용하기로 했다.     

오르한 파묵

작가 오르한 파묵은 이 소설을 준비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순수 박물관 (원래는 퓌순이 결혼하여 살고 있던 아파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 박물관은 소설의 발간 시기보다 늦게 문을 열었고, 소문에 의하면 책의 각 장면을 나타내 주는 전시물들이 완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박물관의 전시물이 소설 속, 사랑을 표현해 주기에는 충분했다는 소리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인공 케말이 사랑했던 여인, 퓌순이 피웠던 담배꽁초를 전시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케말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을 소유하는 방법으로 퓌순의 물건을 모으는데, 바로 그녀의 담배꽁초였다. 케말은 퓌순이 피우고 난 4213개의 담배꽁초를 모았다. 담배꽁초의 형태는 퓌순이 그것을 끌 때, 느낀 강렬한 감정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케말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퓌순이 피우고 재떨이에 비벼 끈 담배를 나는 다른 것들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담배 상표가 아니라, 퓌순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형태, 그리고 그녀의 감정과 관련이 있었다.”

순수 박물관에 전시된 퓌순의 담배 꽁초

다시 이 소설의 표지에 있는 카피로 돌아가고자 한다. 케말은 퓌순과의 만남을 ‘시간’의 언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오르게 한다. 알베르틴을 잃은 마르셀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내 마음속에서 내 손으로 없애야 할 것은 하나의 알베르틴이 아니라, 모든 알베르틴, 심상마다 한순간에 한 시기에 결부되어 있어서, 그 알베르틴을 상기하였을 때 나는 그 자리에 다시 놓이는 걸 느꼈다. 그런 과거의 순간은 결코 부동한 것은 아니다. 미래 쪽으로 (그것 자체가 과거로 되고 만 미래 쪽으로) 끌고 가는 움직임을, 우리 자신도 거기로 끌어가면서 우리 기억 속에서 계속한다.”      


사람은 눈앞에 있는 것만을 소유한다는 마르셀의 고백처럼, 이 책의 주인공 케말도 끊임없이 퓌순을 찾지만, 그의 소유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케말은 이것을 ‘선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점으로서의 시간’으로 묘사했다.     


“내게 있어서 행복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처럼 선이 아니라, 이런 감정적인 순간들을 하나하나 놓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면, 연인의 식탁에서 팔 년을 기다린 것이 조롱거리나 기행이나 강박 관념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퓌순 가족의 식탁에서 보냈던 행복한 1593일의 밤으로 보일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 좌절’ 또는 ‘남겨진’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언급한 수많은 사랑의 단상들의 결말들을 정의해 보라! 어떤 것은 소유하는 프랑스인의 사랑이며, 또 어떤 것은 영원히 닿지 않는 독일인의 사랑이 아닌가? 또 어떤 것은 마르셀의 사랑이자, 또 다른 것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 멈춘 박물관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곳에서만 오직 순수한 모습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은 아무리 미화시켜도 성욕이 우선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책, '사랑은 없다'의 첫 장에서부터 지독한 허무주의를 쏟아 낸 바 있다. 마치 진화 심리학 이론 같은 이 말은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주제의 일차적 대상은 여성의 육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사랑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사랑, 심지어 신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앞서는 시작점이 된다. 이 책 역시도 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또 한 거기서 끝나지도 않는다.     


건축학 개론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는 젊은이들 사이에 한 가지 재미있는 논쟁거리를 남겼다. 남자 주인공의 선배(유연석 분)는 과연 여자 주인공 (수지 분)'과 잤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논쟁이다. 물론 이는 수지를 국민 첫사랑으로 여기는 많은 남성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사랑은 복잡하고, 애매하며, 예측 불가능하고, 해석하기 힘든 감정임에 틀림없다.      


사랑에는 기쁨과 불안, 질투와 슬픔, 분노와 죄책감, 후회와 감격과 같은 인간의 온갖 감정들이 녹아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첫사랑일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첫사랑이라는 글자에는 ‘소유’와 ‘독점’이라는 욕망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독점적인 사랑을 얻기 위해 무지막지한 정신적 에너지 낭비를 감수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이란 책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사실상 현대 세계, 세속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이 모든 규범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결코 그저 두 개인 사이의 기분 좋은 동거를 목적으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타자의 실존에 관한 근원적인 경험이며, 아마도 현시점에서 사랑 외에는 그런 경험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사랑이 이렇게 거대한 것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투여되는 에너지의 양도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집착이라고 부른다.      


한편 한병철은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고 이야기하며, 사회적 문제로서의 에로스를 성적 감각과 타자로 환원시킨다. 결국, 타자를 확인하는 것은 감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국 부모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결코 사회적 사랑과 분리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작가 오르한 파묵은 모든 에너지를 연인에 대해 집중시키며, 에너지의 범위를 ’ 동거‘외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확장으로 인해 케말의 불가능한 사랑은 우울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작가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의 ’ 필요 에너지‘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웹 소설을 다시 생각하다.

“어떻게 웹 소설은 소설 시장을 장악했는가?”라는 자극적인 카피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웹 소설이 소설 시장판을 점령했는지를 알 수 있는 통계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저기 문학가의 소식을 들어보면 웹 소설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소설 판 위 영향력을 크게 키워나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간혹 정식 소설을 쓰다가 웹 소설 작가로 전향한, 또는 전향하고 있는 작가들이 쓴 소회를 읽어볼 기회가 많아졌다.      


그들 대부분은 소설의 예술성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전통적으로 소설이 가지고 있는 문학성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철학과 문장력의 조화가 웹 소설에서는 발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전통 소설 작가들이 웹 소설에 도전하여 실패했다는 소문과 실패한 원인에 관하여 쓴 글들이 올라왔다. 그 글들을 보면 이제 더 이상 웹 소설이 소설계의 불량식품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다.     


소설은 두 가지 지평에서 읽힌다. 하나는 작가의 지평으로 스토리와 구조와 철학과 문장력은 이 지평 위에 다루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평은 독자의 지평으로 서재와 도서실과 카페와 지하철, 헤어진 후와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는 시점에 만나는 지평이다. 웹 소설에 실패한 작가들은 주로 이 두 번째 지평에서 그 실패한 원인을 찾는다.      


번잡한 지하철에서 잠깐씩 읽는 웹 소설은 그 스토리가 복잡하거나 다층 구조로 되어 있으면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도 가능한 이해하기 쉬운 직선 구조를 가져야 하고, 10분에 한 번씩 극적인 상황이 일어나서 졸음을 깨워야 한다. 전통적 작가들이 적응하기에는 호흡이 너무 빠르고, 숨쉬기조차도 쉽지 않다. 더욱이 전통 소설의 완성도와 웹 소설의 완성도 간에 존재하는 인식과 기준의 차이에 스스로 적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전향한(?) 작가가 아닌 처음으로 웹 소설에 도전하는 예비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준비하며 지낸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지낸 시간’의 모양이 어떠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소설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아마추어 예비 작가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 소설에 대해 공부를 했거나 생각을 했을 것이고 나름대로 기준이나 색깔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웹 소설 작가로서 처음부터 성공한 사람에게서는 예외 없이 성향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성향이 대중의 성향과 태생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성향이 대중의 성향에 녹아들어 갈 수 있는 작가는 모자란 문장력과 철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성공한다. 그러니 작가로서 매우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성향을 극복할 준비 역시 되어 있어야 한다. “쓰고 싶은 것을 써!”라고 철없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질문이 있다. “웹 소설은 예술적일 수 없는 것일까?”     


오늘날 웹 소설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첫 번째 주제는 무협 판타지다. 주로 남성들의 성향과 일치하는 소설이다. 두 번째 주제는 로맨스다. 로맨스 웹 소설에는 몇 가지 고정된 성공의 조건이 있는데, 완벽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집착하는 가난하고 초라한 여자가 나와야 한다. 물론 이는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장 곤란한 질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 의존적 로맨스에 집착하는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은 짧은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고, 의식의 흐름이 매우 빠르다. 그러면서도 깊은 사유의 역동성이 넘쳐난다. 이런 소설이라면 웹 소설로서도 성공했을 것 같다.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 사랑의 사회학에 대해서, 사랑의 구조와 대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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