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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Dec 29. 2018

‘사랑은 왜 아픈가?’

책 속의 사람들

사랑은 왜 아픈가?


저자 에바 일루즈는 이 책을 통해 ‘사랑’을 구성하는 심리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를 분리하거나 결합하여 사랑의 감정을 규명하고자 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사회적 이동과 구조를 분석하여 이것이 어떻게 사랑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 것 같다. 다음과 같은 말이 저자의 의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사랑과 경제적 계산의 혼합은 현대인의 사랑에 주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현대인이 받아야만 하는 모순적 강제의 중심을 형성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현대의 사랑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따라가 보고 싶은 붉은 실마리 가운데 하나다.”     


사회적 규제와 개인적 심리 사이에 끼어 있는 현대인의 경험을 사랑과 아픔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겠다는 의욕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는 오히려 사회학에 쏠려있다. 방어적 글쓰기에 능한 학자답게 저자는 개인의 심리적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속에, 결국 그 차이는 사회와 집단이 심어준 것이라는 의견을 숨기고 있다. 결국, 심리학의 작동 그 자체가 사회학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에바 일루즈에게 있어서 사랑이 아픈 것은 오직 사회학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에바 일루즈는 일명 ‘감정의 사회학자’라고 불린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 체제를 대변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감정에 어떤 구조적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치기를 좋아한다. 이 책 ‘사랑은 왜 아픈가 “에서 거론되는 논점 역시 제목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가 다루는 사실과 지평은 매우 넓고, 따라서 다른 학문과 많은 접점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생각은 책의 곳곳에서 진화론, 인류학, 심리학과 조우하고, 정치사회학, 철학과 만난다.      


저자는 일차적으로 사랑의 고통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에 대해 점잖게 비판한다. 심리학적 접근이 모든 고통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렸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오로지 자아와 개인의 심리 변화의 문제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통의 원인을 알아내고 그것을 객관화시키는 것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단순한 계산은 신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는 주장이 엿보인다. 그에 따르면 심리학은 고통의 유물적 근거들을 무시한다.           


저자의 이런 비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언젠가부터 법륜이나 혜민과 같은 불교 수행자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의 강연이나 저술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이러한 심리적 치유 행위들은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없다. 앨버트 엘리스의 ’ 잘못된 신념‘에 대한 관점도 조정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칫하면 감정에 대한 모든 책임이 인간의 ’ 잘못된 신념’으로 치부할 이론적 근거를 남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상은 불공평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 왜 잘못된 신념일까?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개선하고 고쳐야 할 사회적 문제를 단지 심리적 안정을 얻고자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구조적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고 자신의 내면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하는 의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이러한 의문들은 절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상 수업이나 교회에서 주일마다 행해지고 있는 예배 행위, 기도원에서의 금식 기도 등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 현시대의 인간관계가 끌어안은 문제, 즉 정체성과 자아의 문제에 대해 어린 시절에 뿌리내린 억압 기재의 해독이나, 자아에 대한 부족한 통찰이 아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긴장과 모순의 다발로서 찾아내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 역시 의심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고통의 원인에는 사회적 이동이나 변화와 관계없이 구조화된 심리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현상’에 대한 레이 커즈와일의 다음 이야기는 이러한 문제를 보다 선명하게 해 준다.      


”최근에는 사랑에 과학까지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사랑에 빠질 때 생물학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행복과 기쁨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노르에피네프린 수치가 상승하여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희열이라는 감정에 휩싸인다. (...) 사랑에 빠지는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이러한 생물학적 반응은 언뜻 보기에 ’ 싸우거나 도망치는 ‘ 메커니즘이 활성화된 상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상대를 향해 달려든다는 것만 빼면 사실, 나머지 특성은 똑같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사랑은 위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      


오늘날의 뇌공학은 ’ 동일한 변화에 대해 다른 심리적 반응‘, ’다른 상황에 대한 동일한 감정‘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커즈와일의 주장에 따르면 사랑의 아픔은 사회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유물론적 현상이다. 물론 사회학자들은 유물론 역시도 사회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대개 환원 주의자가 된다.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고부동한 기준에 의존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관점은 저자의 지평이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 즉 사회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 82년생 김지영‘이후 새롭고 창발적인 관점이 제시되고 있지 못한 한국 워킹맘들의 고통에 대해 이스라엘 여성 에바 일루즈가 가진 통찰이 얼마나 공감을 얻으며 침투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의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다.


에바 일루즈

사회학자로서 저자는 사랑의 감정을 선택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인의 선택은 수많은 현실적 조건을 놓고 이루어지며, 욕구와 감정과 라이프스타일 선호도를 서로 가늠해보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자,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의지와 감정 생활의 결과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사랑이란 시시각각 변해가는 감정의 상황에 적당히 대처해가면서 그 수급의 균형을 맞추어가는 거래 과정이며 선택은 바로 이 거래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과 같이 감정의 주고받는 선택적 거래로 유지되는 것일까? 에 대해서 커즈와일이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간섭한다.      


”사랑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마침내 연인이나 배우자는 신피질의 주요한 일부가 된다. 두 사람이 수십 년을 함께 살다 보면, 우리 신피질에 가상의 상대가 머물게 된다. 다시 말해 연인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턴 인식기는 상대를 반영하는 생각과 패턴으로 가득 찬다. “          


제도와 관습이 개인의 감정을 제약하고, 제약된 감정이 사랑의 구조를 낳는다는 저자의 생각은 한편으로 옳지만 전부 옳지는 않다. 이런 저자의 관점은 ’ 뉴턴의 스펙트럼에 대한 괴테의 색채론‘을 떠올리게 한다. 뉴턴은 빛에 대해 파장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스펙트럼으로 분석하여 일곱 가지 색깔로 구분해 냈지만, 괴테는 이러한 물리적 색은 결국 인간의 생체적 색에 의해 수용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늘날 괴테의 생체적 색은 소위 ’ 원추 세포‘의 존재로 규명되었고, R-G-B 세 가지 종류로 구성된 원추 세포는 물리적 빛의 다양한 색깔을 조합해 낸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제도와 관습이 인간의 감정의 객관적이고 물리적 조건일 수는 있으나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의지이다.      


에바 일루즈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문학을 동원한다. 문학은 비록 허구이지만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동원의 정당성이다. 저자가 증거로 제시한 문학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했던 오스틴의 소설이다. 오스틴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통해 한 여인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적 낭만, 즉 사랑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렸다. 이성을 자랑하던 계몽주의 시대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사회적 구조와 제약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에바 일루즈의 ’ 문학 동원’을 보면서 종교적 사회와 세속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자라나던 시절의 터키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사랑을 다룬 오르한 파묵의 ’ 순수 박물관’을 떠 올렸다. 이 책이 에바 일루즈의 대척점에서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에바 일루즈가 기든스의 새 모델, 즉 ’ 순수한 관계’를 도입하여 권력에서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계약적 사랑을 이야기할 때, 오르한 파묵의 ’ 순수 박물관‘은 오히려 ’ 순수한 관계’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이러한 순수한 관계가 사적 영역을 규범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낭만을 꿈꾸는 의식을 불행한 의식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무엇이 사랑을 불안함과 막연함, 심지어는 절망의 만성적 원천이 되게 만들었는지는 내가 보기에 사회학을 통해서만, 현대라는 문화와 제도의 핵심을 이해함으로써만 풀릴 문제다.”라는 그의 말은 결국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프게 하는 주범이라는 단언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란 말은 일종의 계급이란 단어로 바꾸어도 된다. 남성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생식의 성공률, 즉 결혼의 선택권이 결정된다는 이론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역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조던 피터슨은 ”현 지배구조 내에서 위치가 높을수록 여성의 선택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라는 주장을 ”남성들은 실현 가능한 모든 지배구조 내에서 높은 위치를 선점할 능력으로 선택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로 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최근 수십 명의 여성 신도를 성폭행한 한 목사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교회라는 제한된 지배구조, 특히 이상한 신학으로 중독된 이상한 교회의 지배구조 내에서만 자신이 선택될 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특수한 지배구조 내에서만 높은 위치를 선점할 능력이 발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구조에서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와도 그런 능력 수치는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에바 일루즈의 생각을 걸러내면, 오르한 파묵의 ’ 순수 박물관‘ 속 사랑은 오직 문학 작품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거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추구하는 사랑이다. 그는 현대인은 더 이상 그런 사랑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을 할 때 즈음 ”아픔은 자연의 산물이며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해 주는 지표다. 아무런 아픔 없이 인생을 헤쳐왔다는 말은 살아보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말하며 한발 물러서며 비판을 비켜나간다.     


로크 파와 루소 파

최근, 기독교 심리학과 안티 페미니즘으로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조던 피터슨 교수는 자신의 책 ’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바닷가재와 굴뚝새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이야기 하였다. 조던 피터슨에 따르면 바닷가재와 굴뚝새는 사는 지역도, 환경도, 생존의 방식도 다르지만, 자신의 영역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의 법칙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런 생존 법칙은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며, 이러한 영역 싸움의 문제는 결국 세상이 본래 불공평하다는 것을 증거라고 말했다.      


젠더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구조가 문명 이전의 문제인지, 아니면 문명으로부터 탄생한 문제인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와 사회학이라는 관점에 서 있는 에바 일루즈는 사랑의 아픔은 결국 사회적 관계, 즉 문명의 문제로부터 발화되었다고 믿고 있다. 반면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남녀 문제를 포함하여 사회적 구조는 문화보다는 자연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조던 피터슨의 주장을 들어보자.     


”서열 구조는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다. 군산복합체도 아니고, 가부장제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문화적 인공물이며,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열구조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영속적인 특성에 가깝다. 서열의 변화는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서열구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탄생 이후 ’ 우리‘는 아득히 먼 옛날 속에서 살아왔다. 피부와 손, 폐와 뼈를 갖기 전부터 서열을 두고 싸웠다. “     


이에 더하여 문명 이전의 복합 수렵 사회와 문명 이후의 정주 사회에서의 전쟁과 다툼을 연구한 아자 가트는 ’ 문명과 전쟁’에서 전쟁과 계급투쟁의 증거들이 수렵이나 거주 시기에 공히 존재하나, 확실히 이것이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에바 일루즈의 입장에 가세하고 있다.     


”결국, 동물과 인간을 막론하고 공격성의 사용 여부는 주어진 상황에서 기회와 위험, 보상과 대안으로 놓고 계속되는 직관적 평가에 따라 좌우된다. 성공 가능성이 적고 위험이 크다고 해도 보상이 클수록, 그리고 대안이 덜 유망할수록 공격성을 선뜻 사용할 것이다. 각각의 종과 종내 개체들은 자신의 특정 상황을 고려해 전략을 다양하게 조절한다. “      


모계사회와 결혼 기피 현상

에바 일루즈는 섹스 파트너의 지나친 증가와 과잉이야말로 선택의 생태에 변화를 불러온 주된 원인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무한한 섹스 파트너를 가진 모계사회가 참고될 만하다. 배우자 선택의 핵심 요소가 자기 성찰인지 여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의 연구 결과에서 확실히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확실히 정서적 차원의 결합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추출한다. 자신을 성찰하면서 결합의 합리성을 찾는 것은 오히려 결혼의 방해 요소라는 것이다.      


중국 내륙 오지의 모수이족은 모계 집단이다. 그곳에는 아버지란 개념이 없다. 여러 명의 남성으로부터 얻은 아이들은 모두 어머니가 돌보면서 가계를 이룬다. 정년기의 남성은 여성의 집 담을 기어오르며 구애를 하지만 섹스는 오직 여성의 의지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공동생활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남성은 가족에 대한 아무런 의무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남녀 관계는 오로지 여성의 섹스에 대한 성향과 의지에 좌우된다. 이 사회는 너무나 평화롭고 평등하다.      


한편 인도네시아 니먕카바우 모계사회는 이와는 조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곳 역시, 여성이 가족의 가장 역할을 하는 사회이지만 사실상 여성이 남성을 소유한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바뀌었을 뿐, 사회적 지배구조와 소유구조는 일반적인 다른 사회와 동일하다. 이곳에서는 분쟁과 다툼의 역사가 있다. 결국, 사랑, 사랑의 감정, 사랑의 고통의 문제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소유구조, 지배구조, 정치-경제적 여건이 제도와 규제를 생산하고, 감정과 고통을 재생산해 낸다. 반면 다른 측면도 있다.      


저자는 결혼에 대하여 남성과 여성 간에 존재하는 태도의 차이를 지적한다. 여성이 관계 맺기에 대해 비교적 유연하고 용감하지만, 남성은 관계 맺기에 대해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 남성의 이런 모습은 안정적인 관계와 구속받기 싫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인 반응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 심리학적, 사회적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결론적으로 남성이 가지고 있는 ‘결혼 기피 성향’은 남성이 처한 생태와 선택의 구조적 특성으로부터 그 원인을 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자의 태도를 병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대신, 우리는 어떤 사회적 관계가 남자로 하여금 ‘결혼 기피증’이나 평생 독신을 가능한 것이거나 심지어 더 바람직한 것으로 희망하게 만들었는지 물어야 한다.”     


에바 일루즈의 이 말을 모계사회에 적용해 보면 매우 재미있는 의문들이 떠오른다. 만약 남성으로부터 모든 사회적 부담이나 가족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거나 완화한다면 남성의 결혼 기피증이 사라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유의 욕망이 존재하는 한,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의 집착이나 기피 현상은 존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의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국 여성의 결혼 기피증

에바 일루즈의 말처럼 한국 사회는 남성의 결혼 기피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많거나, 남성의 섹스가 확실한 사회적 계층화를 이루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한국 사회는 여성의 결혼과 출산 기피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다음은 2010년에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에서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에 결혼 적령기 여성의 미혼율은 1990년 22.1%에서 1995년 29.6%, 2000년 40.1%로 급격히 높아졌다. 또 20대 초반(20∼24세)의 미혼율은 같은 기간에 62.5%에서 93.7%로 높아졌고 30대 초반(30∼34세)은 2.1%에서 19%로, 30대 후반(35∼39세)은 0.7%에서 7.6%로 높아졌다. 특히 45∼49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2005년(2.4%) 비율은 30년 전(0.2%)보다 무려 12배나 증가했다.”      


2010년의 연구 결과이기는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하거나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한편,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 성적으로 문란해질 가능성이 큰 것 역시 사실이나, 오늘날 사회 구조는 남성이 무작정 자신의 섹스 대상 범위를 늘릴 수 있게 허락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성공한 남성의 섹스와 계층 구조 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대체로 한국 남성에게는 자신의 아내 이외에 섹스의 대상을 확대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거리의 여성과 뒹굴던지, 자신의 부하직원을 성추행하던지, 아무도 모르게 위험한 관계를 맺던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자가 던져준 결혼에 있어서 남성의 태도를 결정한 ‘생태’와 ‘인지’에 대해서 한국 사회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남성이 아닌 여성의 결혼과 출산 기피 현상, 둘째, 남성들의, 특히 권력이 있는 남성들에 의해 야기된 ‘Me Too’ 현상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전문가들이 에바 일루즈의 관점을 소환하여 연구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82년생 김지영’에만 의존할 것인가?)     


구조주의 학자 레비스트로스는 근친혼 금지가 일종의 사회적 거래에서 기인한 구조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내가 소유한 여자라는 재산을 팔 수 있는 물건(?)으로 보존하는 것이 근친혼 금지의 기원이라는 뜻이다. 이 주장의 진위를 따지고 싶진 않다. 단지 한 가지만은 확실히 챙기고 싶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론과 상관없이 여성은 뿌리 깊은 사회적 억압구조 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페미니즘을 포함한 젠더 운동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고, 이에 대항하는 남성의 태도는 신경질적이기 이를 데 없다.          


한국의 페미니즘

에바 일루즈는 페미니즘이 섹스의 상품화 결혼의 자본주의화를 부추기는 데 있어서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섹스에서 윤리와 도덕을 제거하고, 남성 혐오를 넘어서 사회 혐오에 이른 페미니즘은 진흙탕 속에서 열정 없는 몸뚱이들만 섞여서 뒹굴게 했다고 저자는 탄식한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늘 화가 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사회적 통계나 인과 관계 역시 그들의 주장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은 다양해졌다. 남성을 혐오하지 않는 행복한 페미니스트(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도 있고, 무언가 부족하다고 고백하는 페미니스트(록산 게이)도 있다. 여성 심리의 원형을 찾아다니는 페미니스트(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있는 한편, 길에서 희망을 찾는 페미니스트(글로리아 스타이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실패할 것이다. 다행히 역사는 실패 속에서도 교훈을 남긴다.     


한국 사회에서 20대 남성들의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신경질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소위 한남(한국 남자)이라 불리는 한국의 20~30대 남성의 불만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도대체 한국 남성이 여성에 비교해 누린 사회적 특권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 남성의 경제 활동이 한국 사회의 안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상황에서 남성이 가졌던 우선권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남성, 특히 사회적 적응이 완성되지 않은 20~30대의 한국 남성들이 여성보다 사회적 고통이 절대 적지도 않으며,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특권은 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보이는 일종의 집단 정체성의 문제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다. 한남(?)들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마치 모택동 시절의 홍의군. 같다고 말한다. 자신들과 의견이 같지 않으면 무조건 공격하기 때문이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자주 쓰는 말, “방관은 범죄다.”라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참여의 선택과 방법’을 ‘방관’으로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촛불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박근혜 정부의 부역자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집단 정체성에 대해 한남들은 충고한다. 만약 광화문 광장에 모인 20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이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을 “방관하는 범죄자”로 몰아붙였다면 오늘날의 촛불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남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소위 듣도 보도 못한 역사적 차별 비용을 지불하라는 요구 때문이다. 과거에 여성이 수많은 차별을 받아 왔으니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남성이 희생되는 차별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게 사는 미래를 위해 일시적인 남성의 희생을 감수하라는 요구는 20대 한남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최근 워마드라는 사이트에서 행해지는 성상 모독이나, 강남의 어느 술집에서 있었던 여성들의 남성성 비하의 경우도 일종의 과거와 현실에 대한 보상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소위 오른쪽으로 꺾여 있는 핸들을 똑바로 하기 위해 왼쪽으로 과도하게 꺾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야하고 괴기한 복장과 몸동작으로 행진하는 성 소수자들의 거리 행진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성 소수자들)은 최소한 자신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한남들의 시각에서 보면, 얼마 전 있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의 핵심은 사회 안전망의 문제이다.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투의 문제도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일반화된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자의 안전을 위해서 남자를 불심 검문해야 한다는 주장, 미투를 지지하는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 낙태에 대해서는 남자들에게 동일한 법률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억지 등이 한국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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