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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Oct 04. 2018

‘종교 없는 삶’,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책 속의 사람들

종교 없는 삶 

여러 가지 우회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란 명백히 기독교를 지칭함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책의 의도가 기독교를 공격하거나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무신론을 옹호하고자 쓰인 글이다. 그렇지만 무신론자를 향한 기독교의 공격에 대해서는 격렬하고, 신랄하며, 집요하게 반박하고 있다. 기독교를 비판함으로써 무신론에 대한 공격적 방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필 주커먼은 자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명백한 무신론자라고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라 불리는 것은 싫어한다고도 했다. 무신론자라는 말에는 어딘가 모르는 결핍이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어떤 측면에서 불가지론자란 말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릴 수도 있으나 이 또한 지적이고 방어적이기에 자신을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종교적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좋아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지칭할 수는 있어도 자기의 정체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도 했다.     


결국, 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찾아낸 정체성은 ‘경외 주의(aweism)’라고 결론을 내렸다. 저자는 경외 주의란 “궁극적으로 실존이 아름다운 신비이며,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의 원천이고, 창조와 시간, 공간 같은 실존의 심오한 문제들이 깊은 기쁨과 통렬한 아픔, 숭고한 경외감을 자아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개념을 압축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눈치챘겠지만 이런 장황한 설명은 그 정의(定意)가 자명(自明) 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필 주커먼은 자연과 역사, 생명의 역동에 대한 경외감을 느낀다는 측면에서 경외 주의는 유신론과 유사할 수 있으나 경외 주의자들에게는 세계의 기원이나 미래를 설명할 이야기, 경전이나 계율이 없다는 말로 유신론과 경외 주의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 많은 무신론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기독교의 영향 아래서 성장했지만, 곧 기독교를 떠났다. 그리고 기독교를 향해 비판의 사격을 가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그의 사격이 집중된 곳은 역시나 ‘도덕의 문제’다. 대부분의 무신론 지성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 역시도 인간의 도덕성은 근본적으로 진화론과 환경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그는 진화론적 이타주의의 토대 위에 안정적이며 안전하게 성장한 아이가 타인들에게 친절하고 섬세하며, 인간적인 도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종교가 인간의 도덕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개별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필 주커먼은 ‘우리의 도덕성이 어디에 근원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매일의 삶에서 이 도덕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도덕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종교가 없는 사람들 역시도 “나를 길러 준 사람들과 내가 살고 있는 문화, 나의 뇌, 삶을 헤쳐 나가면서 경험한 일들에서 얻은 교훈들을 통해서”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종교 없이 인간은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런데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이타주의가 자신의 우회적 안전을 가져다주고, 무한대로 이어진 인류 발전의 궤적 속에서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한정된 나의 삶, 나의 뇌, 나의 문화 속에서 유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가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결정적으로 도덕과 이타주의가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점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필 주커먼

첫 번째 사격이 개인의 도덕성을 향한 것이었다면 그의 두 번째 과녁은 사회나 국가에 대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오늘날 종교성이 강한 국가들의 명단과 상대적으로 종교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국가들의 리스트를 비교하면서 종교성의 부재가 좋은 사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다소 감정적이고 극단적으로 증명을 해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논지가 다소 지나치다는 것을 눈치챈 저자는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는 이런 극단성을 완화하고자 한다.     


“지난 세기 최악의 몇몇 사회들은 무신론자인 독재자가 통치한 곳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을 인정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은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즉,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국내의 여러 주를 비교해 볼 때, 무종교적인 경향이 강한 곳들이 한층 종교적인 곳들에 비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 잘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사회의 종교성과 문화의 수준을 비교할 때는 공시적인 시각과 함께 통시적인 탐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시적 관점에서도 상대적인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여야 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억압 관계, 상대 관계,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종교가 사회의 도덕과 문화에 긍정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할 것이 없다.      


필 주커먼은 기원전 7세기 인도의 차르바카 철학자 집단, 중국의 순자, 구약의 전도서를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의 철학자 코헤렛, 그리스와 이슬람의 무신론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무신론의 계보를 추적한다. 그리고 종교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네 가지로 설명한다. 저자가 주장하는바, 첫 번째 원인은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같은 작가들이 쓴 베스트셀러나 존 스튜어트나 스티븐 콜버트, 빌 마허 같은 인물들이 종교에 대해 쏟아부었던 조롱이나 불경하고 무례한 논쟁이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종교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두 번째 원인으로는 소위 기독교 복음주의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종파들의 보수적인 정치색이 지목됐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반대하고, 낙태를 불법화하며, 학내 기도와 채플을 지지하고, 성교육 및 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한편,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총기 규제를 반대하며, 테러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 전쟁을 옹호하는 등의 부도덕한 정치 행위를 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을 종교 밖으로 몰아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필 주커먼이 제시한 탈종교화의 원인은 종교인의 타락이다. 그는 가톨릭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을 예로 들고 있다. 만약 그가 기독교를 조금 더 들여 다 보았더라면 좀 더 풍성한 사례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의 사회 활동 증가 역시 탈 종교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사회 활동으로 바쁜 여성들의 종교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남편과 아이들도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에 더하여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은 많은 사람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람을 연결해 주며, 이로 인하여 종교가 줄 수 있는 만족감을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탈종교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종교의 무용성, 탈 종교화의 원인을 분석한 필 주커먼은 종교 없이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아이를 키워낼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단정한다. 또한, 종교 없이도 인생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고난을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죽음 앞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세세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필 주커먼은 책의 마무리 부분에서 자신이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 “종교 없는 사람들의 삶과 가치, 경험을 탐구하고 조명해서 이들이 어떻게 사랑과 낙천주의, 독립적인 사고를 중시하면서 살아가는지, 또 어떻게 자녀들을 키우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저자의 주장에서 솔직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 주커먼은 그저 종교가, 즉 기독교가 싫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자신이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명확히 알지 못함이 분명하다. 단지 종교계, 아니 기독교계의 종교성에 관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쓰다 보니 결론까지 왔었을 수도 있다. 다소 어색하지만, 그가 찾아낸 종교 없이 사는 방법에 대한 결론, 즉 ‘경외 주의’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이 덜 경이롭고 덜 싱그럽고 덜 신비롭고 덜 놀랍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무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미학적인 영감과 신비함을 향한 경이, 줄어들지 않는 감사의 마음, 실존적인 기쁨, 타인과 자연 및 불가사의한 것과의 깊은 유대감 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다. 경외를 느끼고 경험하는 데 신은 필요하지 않다. 생명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듯 해 보이는 이 현란한 결론 속에서 종교를 떠나온 자의 길 잃은 넋두리가 들린다. 자신의 도덕에 대한 정체성을 묻는 자에게 나는 무신론자요, 불가지론자요, 무신론적 인본주의자요, 결국은 경외 주의자라고 대답하는 저자는 결국 무대 위에 ‘생명’이라는 막연한 이름을 던져 놓고는 떠나 버린다.     


이런 모호하게 정의된 ‘종교 없는 삶’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이 유의미한 것은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가 결코 도덕적이지 못했으며, 오늘날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실행해 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는 정의와 도덕성에 해악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돌아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국내 대표적인 개신교회 중 하나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는 여러 가지 편법을 동원하여 자기 아들에게 담임목사의 자리를 세습했다. 기독교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자신이 속한 교단의 헌법조차 무시한 결과였다. 세습의 과정에서 많은 목회자가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김삼환 목사의 편을 들기도 했으며, 이러한 내용이 한 지상파 뉴스를 통해서 방송되기도 했다.      


선한 청지기 교회의 송병주 목사는 소위 ‘명성교회 세습 사태’에 대해 “명성교회 세습 유효 재판 결과를 듣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무슨 말로 글을 시작해야 할지, 평생 이렇게 막막한 글쓰기는 처음인 것 같다.”라는 말로 그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기독교계의 어른이신 손봉호 장로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대 스캔들이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도 물론 심각했다. 그러나 외부 압력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명성교회 세습은 외부 압력 없이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을 자행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라며 노구를 이끌고 1인 시위를 하기도 했다.     


올해 초, 대법원은 또 하나의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인 ‘사랑의 교회’ 오정현 담임목사에 대해 소속 교단인 예장합동 교단이 정한 목사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오정현 목사와 예장합동 동서울노회를 상대로 고소된 위임 결의 무효확인 소송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또한, 이 교회는 교회 건물 신축 과정에서 서초구청이 내준 공공 도로 점용허가 취소 판결을 받기도 했다.      


사랑의 교회는 이 판결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목사의 요건은 대법원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 칼럼니스트인 강만원 ‘아르케 처치’ 대표는 이에 대해 “사회법에 따른 판결 이전에 사기로 목사 안수를 받은 오정현은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즉각 사퇴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의 행동을 보면, 마치 운전면허시험장에서 ‘임시운행허가증’을 받은 자가 정식 면허증을 받기도 전에 대형버스에 수많은 승객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치기>가 엿보인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강만원 대표는 올해 초, 한 인터넷 칼럼을 통해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참상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라며 깊은 탄식을 토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교회 관련 음울한 기사들을 보면서 의식이 있는 교인들은 마음속에서 치솟는 분노와 함께, 더 이상 어떻게 할 수조차 없다는 처절한 절망을 느끼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목사들의 추악한 성범죄, 부당세습, 재정 비리, 폭행, 표절, 학력 사칭, 사기, 도박, 불법 건축…. 일일이 나열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만큼, 세상의 온갖 범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참담한 불의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실정이다.”라고 말한 그는 이로 인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위선자들이 운집한 악의 소굴’이라는 조롱과 비난에 반론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한편 양희송 청어람 대표는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교회 나간다는 것이 동일시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제도 교회를 떠나지만, 신앙을 포기함이 아니라 신앙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떠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신앙을 버리거나,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택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실천, 확장, 강화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는 새로운 현상이다.”라고 말하며 이 시대의 종교 타락은 기실 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닌 교회의 문제라고 강변하며, 교회를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에 대한 심층적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의 타락은 필 주커먼이 이 책을 통해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그 심각성이 관용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종교에 대한 합리적이고 타당한 비판이 아니라 종교를 넘어서는 대안들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에 대한 비판 외에 인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도덕이나 실존은 설명하기 복잡한 것이고, 해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말로 결국 이 질문에서 비켜 간 필 주커먼은 감각의 세상 속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살라는 막연한 제안만을 남겨놓았다. 저자가 종교의 대안으로 이야기 한 ‘경외감’ 역시도 이것이 ‘경외감’인지 아니면 ‘경이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사실 경외감이라는 말속에는 창조적 존재에 대한 전제가 들어있는데,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가지론자로 남기를 원한 듯하다.     


이 책은 종교 없는 삶의 아름다움과 지향점을 이야기하고자 했으나 결국 것이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만을 남겨놓았다. 종교적 삶에 대한 비판에 자신의 전력을 쏟은 부었지만 그런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에 대해서는 매우 형이상학적 표현인 ‘경외감’으로 대충 마무리하고 만 것이다. 반면 이 책을 보는 내내 파커 J. 파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라”라는 베네딕트의 계율에 이의를 제기했던 그는 베네딕트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정에 도전하도록 한다. 지금 여기에 완벽히 존재하고, 그럼으로써 영원한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정이다. 올바르게 이해된 영원성은 시간의 영속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지금을 통한 시간의 극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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