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리콜라주 Apr 26. 2021

왜 기억이 나지 않는가?

나도 한때는 전화번호 한 100개쯤은....

"그 저기, 그거 있잖아..."


40대 중반을 지나며 오싹한 공포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머릿속에 묵직한 무언가가 자리 잡아 기억을 위한 시냅스 활동을 적극 방해하는 느낌. 죽은 뇌세포들이 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날듯 말듯한 단어를 떠올려 보려고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입으로 되뇌어 보다가, OPQR쯤 되었을 때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그냥 핸드폰을 집어 들었던 기억은 그저 애교일 뿐이다.


가장 곤란한 순간은 사람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때이다. 정말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말도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 것이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대충 성에 직함으로 때우려고 해 본다. "아.. 기..ㅁ 대리.." 


"저 박 과장입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삐삐라는 물건이 있었다. 친구들과의 모임 약속 확인부터 맘 설레는 이성과의 썸 타기 등등 모든 의사소통은 바로 이 삐삐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8282', '505(SOS)', '1004(천사)', '2626(출발)' 등 한 줄짜리 회색 액정화면에 암호 같은 숫자 메시지를  보며 키득대는 것도 재밌었지만, 직접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이를 확인하는 메시지 사서함 기능은 그야말로 추억의 레전드 감성템이었다. 

공중전화 카드를 들고 달려가 삐삐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청춘들... 이때의 경쟁력은 역시 '번호 외우기'였다. 수첩을 꺼내 들고 번호를 누르는 사람은 노노. 친구, 가족, 중요한 사람의 연락처와 삐삐 번호 정도는 기본으로 줄줄 외우는 것이 그때의 상식이요 국룰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친한 친구의 집전화번호와 삐삐 번호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3165, 1792, 1885, 2842, 5787, 2430, 9072, 6989...


그밖에도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이 있다.


1. 태정태세문단세...

2. 은주진한수당송원명청중

3. 수금지화목토천해명

4.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궁상각치우

5. 헤헤리베비키니오프네나마알지.. 

6. 3.14159265358979..

7.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런젼차로....

7.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안으로는...


그런데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 


단순히 나이 탓, 뇌세포 감소를 논하기에는 이런 과거 기억에 대한 '불멸의 지속성'이 치명적 모순의 상황을 만들어 낸다.


내 기억력이 급속히 감소된 시기가, 언젠가부터 기억을 하지 않아도 기록을 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함이 없게 돼버린 시기와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리라.




필자는 얼마 전에 엄청난 위기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여느 때처럼 퇴근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매우 익숙한 번호로부터 전화가 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의 전화였다. 통화를 다 마치고 생각한다. '왜 그냥 번호가 뜨는 거지?'


엄청난 불안감의 파도 이후 핸드폰 저장 번호 목록을 보는 순간. "헉!" 저장된 번호가 다 사라졌다!


위급한 순간에는 마치 신이 내린 듯한 촉이 작용을 한다. 막내에게 다급히 전화를 한다.


"OO야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응 아빠, 핸드폰에 너무 쓸데없는 번호가 많아서 다 지우고 있었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딸아이에게 첫 스마트폰으로 내가 쓰던 핸드폰을 물려주었는데, 팩토리 디폴트를 하였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 뭔가 성인인증이 필요한 설정을 해주려고 구X계정에 연결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쓸데없이 똑똑한 스마트폰과 막강한 클라우드 백업 기능으로 무장된 구O은 딸아이의 핸드폰에 내 연락처를 자동 백업을 시켜놨고, 자고 일어난 딸은 자기 핸드폰이 잘 모르는 허섭한 번호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체 목록 삭제를 시켜버렸던 것이다. 1시간 후 똑똑한 구O은 계정 연결된 전체 기기의 연락처를 싱크로나이즈 시켜버렸다.


십여 년 전부터 오로지 연락처는 구O의 클라우드에만 저장해 놓아서 세계 어디에 있든, 무슨 핸드폰을 쓰든 구O 계정만 연결하면 만사 오케이였기에, 나는 전화번호를 외울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딸의 전화번호 가운데 자리도 잘 기억을 못 해서 얼마 전 엄청난 혼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 이후 (똑똑한 구O의 '1일 전 백업 복구'라는 기능을 통해 연락처는 무사히 복구할 수 있었다), 나는 중요한 연락처를 클라우드가 아닌 '내 머릿속'에 저장하는 일을 차곡차곡 시행하고 있다. 


아, 뭔가 매일매일 1% 정도 똑똑해지는 느낌... 정말 뿌듯하다.


앞으로도 나는 이런 '고의적 문맹 상황'을 만들고 이에 대처하는 아날로그 대응책들을 하나하나 실천해 볼 생각이다. 나이 드는 것도 싫은데, 핸드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디지털 바보가 되는 것은 더더욱 싫으니깐...


끄읕. 







매거진의 이전글 빵은 왜 위험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