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에 대해
내가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 붙인 인덱스와 메모지의 두께는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래서 결국 나는 책을 덮고도 이 책에 대한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감조차 잡지 못한 채, 혹시나 이해를 도울만한 해설집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이곳 저곳 방황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의 반복 끝에 얻은 단 하나의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지금껏 찾고 있는 것은 해설집이 아니라 정답지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스스로 고민한 이 책의 해설 방향과 타 매체의 해설 방향에서 오는 간극을 인정하지 못하여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인증하기 위해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없는지 한참을 찾아 헤매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그릇을 알고 고집스러움을 접어두어야 할 때가 온 듯싶다.
오늘의 감상문은 순수하게 주관적 감상에 의거한, 다른 글보다 훨씬 더 확실성이 떨어질 수도 있는 글이 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이유로 언젠가 이 책을 재독 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날이 왔을 때 지금의 이 감상이 그때의 감상과 얼마나 달라질지에 대한 기대를 하며 본격적인 감상평을 시작한다.
1부는 페스트가 처음 오랑 시(市)에 퍼지는 경과를 서술하는 부분이다.
페스트는 어느 날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오랑에 스며든다. 거리에 드문드문 보이던 쥐 사체는 매주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몇십에서 몇백, 몇천까지 늘어나 이제는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사실 문제의 본질은 쥐의 원인 모를 떼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기점으로 시민들도 병들어가고 있다는데에 있다. 몸에 종양이 나면서 오랜 시간 버티질 못하고 죽는데, 하필 이 증상이 전염되는 것이라 곧 이 시가 폐쇄될 정도로 그 추이가 빠르다. 의사 리외(본편 서술자)는 이러한 병의 추이를 보며 이것을 오래전 유행했던 감염병 페스트라 판단, 정부에 본격적인 감염병 대처를 위해 시민들에게 병에 대해 확실히 인식시키고 주의시킬 것을 요구한다. 1부의 이러한 병의 발발과 확산, 발표까지 이르는 전개를 보며 나는 지난 날 우리가 겪었던 코로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에서 직접 겪었던 감염병 중 그 크기와 확산세 정도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나마 코로나 정도가 ≪페스트≫를 읽는데 몰입하기가 쉬울 것 같았으며,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병의 증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미치는 감정적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소설 속 페스트의 묘사를 살펴보면 감염병이 확산하던 초기에서 중반까지는 정부 정책을 포함, 감염병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 또한 낯섦과 혼란스러움 내지 두려움에 가깝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금방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 또한 품고 있기 때문에 소설과 같이 감염병이 확산하기 시작할 무렵에서 중반 정도까지는 이 시간을 버티면 예전과 같은 시간이 올 것이라며 서로를 다독일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감염병을 버텨야만 하는 시기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희망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평생을 이렇게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며 슬슬 자조나 푸념, 우울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병이 인간에게 미치는 부정적 감정의 영향이라는 부분에서 보았을 때 페스트와 코로나의 유사점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부가 페스트 발병 기운이 도는 불안하고 음습한 오랑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면, 2부는 본격적으로 페스트와의 싸움을 알리면서 시작된다. 이 시점부터 등장인물의 다양한 움직임이나 내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를 기점으로 페스트와 코로나 사태를 분리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설에서 페스트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물리적인 단절이나 심리적인 압박을 묘사할 때는 나도 모르게 나의 지난 코로나 감염병 경험과 빗대어 몰입했지만, 이 상황으로 인한 등장인물의 심리나 행동 묘사가 보이면 그제야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라는 것을 다시금 인지하고 페스트라는 병마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책 ≪페스트≫의 인물들은 제각기 추상적 상징을 갖고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파늘루 신부는 종교(파늘루는 조건 없는 헌신과 봉사를 상징하는 성인(聖人)이 아니다. 종교를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는 명분으로 삶과 죽음을 교리로 정의하고 스스로는 그 앞에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겁쟁이이다.), 그랑은 꿈과 희망, 코타르는 그늘이나 그림자로. … 주관적 견해이지만.
아무튼 이러한 인물들 가운데 인상 깊은 인물 몇 명이 있다.
하나는 기자 랑베르이다.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타지역 출신으로, 오랑에는 취재를 위해 왔는데 하필 페스트의 발병 시기와 맞물려 발이 묶이게 되면서 감염병의 완전 종식이 발표될 때까지 고향의 아내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 랑베르는 본인은 오랑 출신도 아니고 페스트 환자도 아니므로, 현 사태는 비록 안타까운 일이지만 본인은 타지역 출신이니 참작하여 아내에게로 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랑베르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은 많고, 그런 사람들의 요구를 현 제도상 모두 수용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게 되자 불법적인 방법으로 오랑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게 된다. 실제로 오랜 시간 끝에 랑베르는 오랑을 벗어나 아내를 만날 방법을 찾아냈고, 실제 탈출 동선까지 확보하였으나 오랑에서 머물던 동안 만나왔던 페스트와 싸우던 모든 이들과 자신이 더 이상 출신 지역의 차이라는 빈약한 논리로는 가를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음을 느끼며 돌연 그대로 머물며 자신도 페스트와 싸워 나갈 것을 선언한다.
랑베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곳을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 두고 온 그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 랑베르
위 랑베르의 의견에 리외는 사랑하는 것을 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다며, 굳이 오랑에 남을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페스트의 수마에 언제 당할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오랑에 남기로 한 랑베르의 선택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성 등의 선한 면만을 극단적으로 끌어내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리외나 타루는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자신들이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신성한 마음가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저 당면한 일이고 당장에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내가 랑베르를 리외나 타루보다 훨씬 입체감 있고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게 된 부분이다.
인간은 언제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는 알면서도 후회할 선택을 하거나, 잘못된 시도를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두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불법적인 방법조차 마다하지 않던 랑베르를, 당면한 사태를 삶이니 이별이니 고민할 틈 없이 의사로서의 기술적 행위와 현실적인 감각으로 묵묵히 해결하는 데 주력하던 리외나 마지막에야 그 삶의 의미를 밝히고 죽은 타루에 비해 더 현실적이라 느낀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랑베르가 인간적인 인물이라면, 서기관 그랑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작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항상 방에서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은 페스트로 인해 우울해진 도시에 물든 리외와 타루의 한 줄기 휴식처가 된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 (중략) …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 장 타루
여행객 타루는 자원 보건 대를 조직하여 페스트 진압에 앞장선다. 그는 유년기 트라우마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인물인데 페스트가 어느 정도 진압이 될 무렵 의사 리외와 속을 터놓고 친구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페스트로 사망하게 된다. 위 타루의 대사는 소설을 통틀어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페스트란 표면적으로는 육체적 단절이나 이별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러하기도 하다), 그 내면에는 사람 사이의 경쟁이나 갈등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통틀어 페스트라 표현하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타루의 저 대사로 압축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한다.
이제는 성별, 인종, 종교 등 다양한 이유로 서로를 혐오하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된 세상이라
사실 이 책이 계기가 아니어도 종종 사랑이나 인간다움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 '눈물을 마시는 새'의 주인공 케이건 드라카는 왜 사랑할 수 없을까? 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주인공의 이 질문을 보며 갈등 없는 세상이 어디 있다고 참 뜬구름 잡는 소리하네, 싶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어느새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페스트≫를 읽으면 인간은 모두 사랑하는 존재로 태어났으면서, 어떤 이는 사랑을 포기하고 어떤 이는 사랑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사랑을 포기한다고 비인간적인 사람은 아니며, 충실하다고 마냥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역시도. 그러니 서로 악의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그것을 페스트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사랑으로 페스트를 치료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