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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 Nov 24. 2019

영화<윤희에게>를 보고

- 현재 & 2018년 8월에 쓴 글 [내 마음속의 방]


 “그동안 나를 벌주면서 살았.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잖아.”   - 영화 <윤희에게> -


토요일 오후 4시 30분, 독립영화관에서 <윤희에게>를 봤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눈과 김희애의 메마른 표정들, 손짓들. 그리고 나에게 떠오르는 순간들.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잖아"

그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침묵이 나를 갉아먹고 있을 때.



                                             내 마음속의 방     by Jenna


 내 마음속에는 여러 개의 방이 존재한다. 기쁨, 슬픔, 괴로움, 외로움, 수치심, 가벼움, 밝음 등. 그중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봉해 버린 방도 있다. 아이들이 커서 내 곁을 떠나면, 혼자가 되면 열어 보려고 봉해 버린 방이다. 그 방을 열어 보는 날은 내가 하염없이 무너지는 날일 것이다. 그런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절대 열어 보려고 하지 않는 내 마음속의 작은 방, 나의 아버지가 존재하는 방.     



 그 날은, 경기도에서 대구로 다시 이사한 다음 날이었다. 이사한 집에서는 아버지랑 같이 살기로 되어있었고 아버지 짐을 옮기기 전에 시부모님께 이사한 집을 먼저 보여드리려고 아버지의 이사를 다음 주로 미뤘다.  이사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숙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랑 같이 주소가 합쳐지면 아버지가 빚보증 쓴, 빚이 나와 애들 아빠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담은 전화였다. 그런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났고 그 날 아버지께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휴대폰이 한 번씩 연결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짜증 나고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은 집에 두고 잠깐 아버지가 살던 집으로 갔다.


  이상했다. 현관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안방에 아빠가 없었다. 기분이 이상하고 방 기운이 이상했다. 다시 현관을 보니 아빠의 구두가 그대로 있었다. 뭘 신고 어디를 가신 건지, 다시 안방에 와서 보니 달력 뒷면에 아빠의 글씨가 보였다. ‘재나야,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다. 잘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고맙다’ 이게 뭐란 말인가. 집 앞에 가서 아빠를 찾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우선 파출소에 전화해서 실종신고, 가출신고를 했다. 다시 집에 와서 뒷 베란다에 나가봤다. 거기에서 아빠를 봤다. 천장형 빨래건조대에 매달려 있는 아빠를, 아 빠의 다리를 안았다. 다리가 이미 뻣뻣했다. 경찰이 오고 소리를 지르는 내가 있다. 오열하는 내가 있다. 아빠를 땅에 내렸을 때 혀가 나와 있는 아빠의 얼굴을 본다. 어찌할지 몰라 우는 내가 있다. 아빠는 내가 자신을 처음 발견할 줄 알았을 것이다. 아빠는 앞으로 나보고 어찌 살아가라고, 어찌 감당하라고, 나에게 이런 가혹한 일을 하는 걸까. 그 상황에서도 나는 내 걱정이 들었다. 경찰이 연락했는지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오고 나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는지 암담하다. 아버지의 생활비를 같이 대자고 하자 연락을 받지 않는 오빠에게 아니면 이사 직전까지 나를 외면했던 아이 아빠에게,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할지. 전화를 받지 않는 오빠에게 문자를 남기고 아이 아빠에게 전화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삼촌에게 전화를 하고 경찰서로 갔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것을 삼촌과 숙모만 알고 다른 가족과 조문객들에겐 숨겼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것을 모르는 고모는 장례식장에 와서 “아이고, 때 맞춰서 잘 갔다. 딸내미 고생 안 시키려고 그렇게 갔나 보다.”라고 말했다. 남편 쪽의 조문객들로 초라하지 않은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를 화장하고 납골묘에 모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고 소문이 나지 않게 집을 정리했다. 집에 와서도 아이들 밥을 챙기고 아이들 일정을 챙겨야 했다.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 외할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가 없어서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아이들도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소하고 적응을 하려면 힘들 텐데 더 이상 침대에 누워서 지낼 수가 없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처리할 일이 많았다. 빚보증 때문에 나는 한정승인을, 오빠는 상속포기를 하기 위해 서류를 준비했다. 불쌍한 아빠는 죽어서도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게, 빚이 상속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남기고 갔다. 빚이 나를, 아니 아이들 아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슬퍼할 겨를도 없다. 3개월 안에 법적인 절차를 처리해야 하고 받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법원에서 오는 등기우편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이런 서류상 문제 때문에도 아버지의 죽음을 충분히 받아들인 여유도 시간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을 봉인하기로 했다. 내 마음속에. 내가 온전히 아버지의 죽음을, 아버지의 그 날을 복기할 수 있을 때,  혼자만의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을 때까지.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지 않아도 될 때까지, 내가 쓰러져, 일어서지 못해도 우리 아이들이 영향받지 않을 그 날까지, 아버지의 죽음을 봉인하고 열어보려고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러한 외면이, 다른 면에서도 상황을 자꾸 외면하려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상황을 외면하려는 나를 만들고 있지 않은지 의심이 든다.     


 나는 자살하신 그 날의 아버지가 되어보고 싶다. 아버지가 느꼈을 고독과 고통과 막막함을 알고 싶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것처럼 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버지께 묻고 싶고 알고 싶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나에 대한 사랑, 자신의 존재가 나에게 커다란 짐이 된다는,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짐이 된다고 생각하셔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셨다고 해석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이들 아빠와의 관계도, 시댁과의 관계도 쉽게 풀렸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희생으로 나는 편해졌다. 그렇게 나를 외면하고 나의 존재를 바닥으로 내몰던 아이 아빠도 나를 불쌍하게 봐주었고 어찌 보면 아버지를 모시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어서, 죄책감 때문인지 관계가 부드러워졌고 시부모들도 아버지를 모시려고 했던 것에 반대한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듯했다. 내가 이런 편한 삶을 살아도 되는지, 잠깐씩 불안감이 몰려올 정도로, 내 인생이 이렇게 편해도 되는지, 그게 ‘태풍의 눈’ 같은 시절이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아버지도 행복하라고 유서에 행복하라고 당부했던 말 때문에 행복해지려고, 행복한 척이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아무리 행복한 척하려 해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가 아버지를 자살로 내몰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심들, 아버지에게 했던 많은 독한 말들, 아파서 죽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도 죽고 싶다고 같이 죽자고 붙잡고 악다구니 쳤던 내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지. 아버지의 죽음이 모시지도 않았는데도 모시려고 했던, 효녀로 만들어 버린 상황도,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제 5년이 넘어간다. 그동안 잠깐 좋아지는 것 같았던 아이들 아빠와의 관계는 별거에서, 이혼을 했고  아빠와 나를 외면했던 오빠와의 관계도 잠깐 좋아지다 다시 소원해졌다. 나는 겉모습은 밝고 화려할지 몰라도 너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겪는 거라고 끊임없이 나를 무너뜨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도대체 무엇이 나에게 이런 많은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지. 정말 나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몰고 다니는 것인지. 아이들 아빠와의 별거도 이혼도

 결국에는 내가 잘못되어 있어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자꾸 나를 의심하고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아니라고 나를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이야기해주는데도 ‘넌 괜찮다고, 너라서 다행이라고, 너라서 이겨낼 수 있다고’ 그런데도 나는, 한 번씩 그 자책감과 수치심의 구덩이에 빠져든다.


 이제 시작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었다. 마음속에 봉해 버린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쓰기 위해 2018년 3월부터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거 같다. 내가 어떤 식으로도 비록 서툴고 많이 부족하더라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쓸 수 있다면 난 이제 다른 것들도 외면하지 않고 쓸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살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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