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아니 지키지 않았고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고 장례식장에 갔다.
1952년 12월 13일에 태어난 엄마는 2019년 11월 19일,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경북 어느 곳의 5남매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 첫째 딸이자 외동딸이었던 그녀, 내 엄마.
어린 시절 내내 그녀의 살내음이 그리웠고 청소년기에는 나에게 물음표였던 그녀. 차라리 이 세상에 없다면 마음껏, 지어내서 추억이라도 할 텐데, 살아있지만 추억할 수 없는 그녀를 원망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그녀에게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녀를 여자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했고 예기치 않게 엄마가 되어 내 안의 상처 받은 아이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녀를 다시 미워했다.
가부장제 안의 아내와 며느리로 어떻게든 끼워 넣어서 살려고 발버둥 치던 시절엔 그녀를 인정하면 내가 부정되는 듯했다. 남편의 폭력 앞에서도 자식을 떠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시어머니 옆에서 시어머니처럼 살려고 연기했다. 시어머니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지키고자 한 나의 세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안의 그녀가 나오는 것이 두려워, 그녀와 같은 삶을 살까 봐. 내가 봐도 그녀를 닮은, 그녀의 기질을 닮은 내가 나올까 봐 외면하고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더 이상 전남편 옆에 머물면 안 되는 순간까지도 그녀처럼 되지 않으려고 나를 눌렀다. 내 삶이 그녀의 삶처럼 해석된다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을 부정해야만 내가 살 수 있었다.
난 가출 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빚쟁이에게 몰려 장롱에 숨고 어린 나와 오빠를 방치했던 그녀를.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관대하고 많이 베풀었던 그녀를 기억한다. 엄마처럼 생각했다는 어떤 이와 마주했다. 엄마와 예전에 이야기 중 등장했던 그녀. 그때 ‘엄마의 진짜 딸이네’라고 말했던 그녀. 나보다 엄마와의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 그리고 엄마의 친구들. 엄마의 현 시동생. 자기에겐 엄마 같은 형수였다고, 너무 고마운 형수였다고.
그녀를 원망하는 친정 동생들과 나와 달리, 그녀를 고맙게 기억하는 사람들.
그녀도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지우고 새롭게 살고 싶었을까? 자신에게 어떤 애증도 없는 사람을 만나서 자신을 다시 각인시키고, 도리를 다하고, 정을 나누고.
여자로서 그녀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35년을 같이 한 그녀의 남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았다. 아저씨는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엄마의 의지대로 자식 없이 35년을 엄마랑 같이 살았다. 교통사고 후 1년을 밤낮으로 간호하고 엄마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면서 엄마 옆을 지켰다.
무속인이 되고 엄마는 산으로 바다로 다니면서 굿을 하면서 자신을 내보였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자신을 삶을 즐겼다.
일치감과 완결성을 고집하는 못난 나는, 그런 엄마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전남편에게 들었던 말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자존심만.” 하던 말처럼. 내 엄마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셌던 여자였을까?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부정하던 그녀에게로 난 다시 회귀하는 것일까?
피붙이니깐 모든 것을, 따지지 않고 용인하고 싶지 않았다. 피붙이니깐 더 날카로운 칼날로 자르고 정확한 저울로 가늠질 하고 싶었다.
그리고 홀로, 외롭고 아프게 돌아가신 울 아빠를 위해서라고, 그녀의 죽음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입관을 바라보고 차가운 그녀를 만지면서도 그녀를 편하게 보내는 말이, 내 안에서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난 그녀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을 하고 유족이 한 마디씩 하라고 하는 그 순간에도, 다른 사람이 보는 그 순간에도 한 마디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엄마가 좋아하던 산에, 나무에 뿌리면서 엄마의 온기같은 아직 따뜻한 유골의 온도를 느끼자 그때서야 말이 터져 나왔다.
“엄마, 다음 생이 있다면 또 내 엄마로 태어나 줘. 그래서 나 좀 많이 사랑해 줘. 이뻐해 주고 보듬어줘. 남들한테만 정 내지 말고 나한테 더 많이 해줘. 나 좀 많이 사랑해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