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기억과 역사

배움의 발견, 타라 웨스트오버,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2020.

by 재나

자신의 기억을 믿기 위해서 타라 웨스트오버는 5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썼다.


타라의 아버지, 숀오빠 같은 남자가 한 줄의 문장으로도 자신의 기억을 믿고 정당화할 수 있는데


여성인 타라는 자신의 유년기로 시작해서 20년이 넘는 기억을 소환하고 다른 형제들의 기억을 보충하고 제 3자의 기억까지도 덧붙여을 때,


비로소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까지 몇십 년이 필요했는데


반대로 타라는 기억을 믿는데 20년이 걸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책에 대한 리뷰와 평점이 좋아서 읽어 보고 싶었지만 공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 캐임브리지 대학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의 성공담일 거라는 추측 때문에 읽기를 미루고 있었다.


전반부의 유년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역사학 박사가 되면서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후반에 터져 나오는 타라의 통찰과 여자로서의 각성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왜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역사가 아닌 여성 자신의 역사로, 기억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타라의 여정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모르몬교라는 강력한 종교와 공교육의 부재, 그리고 경제력 미자립이라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음을 책 속에서는 타라의 경험으로 보여준다.


종교와 남성 가부장제의 결합,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들이 왜곡되고 결국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다른 여자들을 기억마저도 거짓으로 단정하고야 마는 타라의 엄마, 언니, 주변의 여자들이 책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반하는 타라가 어떻게 배척되고 그들에게서 존재가 부정되는지도.


미국에서 태어나 공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배움의 열망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와 한국에서 태어나 공교육을 받고 주부로 엄마로 살다가 이혼녀가 된 나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타라가 느꼈던 (p315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뭔가 불순한 요소가 들어 있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혐오와 끊임없이 자기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는 행동에서 여자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제까지 여자로 존재하던 방식과 여자로 사고하던 방식이 타라와 내가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타라가 자신을 찾아가는 인식과 통찰의 과정에서 나 또한 나의 과거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p403 나는 나의 갈망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지식,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 머리에 심어진 것들이었다. 그 목소리들은 때로는 속삭이고, 때로는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염려를 하며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그 목소리는 내가 옳지 않다고 속삭였다. 내 꿈은 왜곡된 것이라고. 그 목소리는 여러 사람의 것이었고. 다양한 말투로 나타났다. 어떨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지만, 나 자신의 목소리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p403 <그 주제에 관한 어떤 지식도 최종적 결론이 될 수는 없다.> 밀이 염두에 둔 주제는 여성의 본질이었다. 밀은 여성들이 너무도 긴 세월 동안 강제당하고, 회유당하고, 옆으로 밀려나고, 여성적이라는 미명 하에 일그러져 왔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타고난 능력과 염원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피가 머리로 몰려들었다. 아드레날린과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느낌이 함께 밀려들면서 내 정신을 깨웠다. <여성의 본질에 관한 어떤 지식도 최종적 결론이 될 수는 없다.> 진공 상태, 지식이 부재하는 검은 공간에서 그만큼 위안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밀의 선언은 <네가 무엇이든 간에, 네가 여성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p410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날 밤에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내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게 됐다. 내가 침묵을 지켰어야 했던 때 입을 열었고, 말을 해야만 했을 때 입을 다물었었다는 사실도 함께 이해하게 됐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혁명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맡아 왔던 오래되고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역할을 뒤집는 것. 필요했던 것은 - 에밀리 언니가 필요했던 것은 - 가식에서 해방된 여성, 자기 자신이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성이었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여성, 맹종의 태도를 버리고 행동을 취하는 여성. 아버지로 성장한 여성.

p424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에 엎드리고 목을 누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p471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이제 이해가 됐다. 아버지가 내게서 쫓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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