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라는 성소

by cuniculus

2024년 벽두 한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책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순식간에 서점가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는 사랑하는 형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가 된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일에 지원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그가 10년 동안 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수많은 시간을 견뎌온 작품들과, 또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이 공간에 발을 들인 사람들과 지내면서 서서히 가족을 잃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브링리가 죽음이라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미술관이라는 예술의 공간을 애도의 공간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종교의 시작에 언제나 ‘죽음’이 언급되듯이 (인간의 최초의 “종교적 행위”는 죽은 자의 시신을 함부로 두지 않고 따로 놓아둔 흔적, 즉 일종의 무덤을 만든 행위라 이야기된다), 예술의 시작과 관련된 이야기에도 죽음 혹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absence)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회화의 기원에 관한 전설에는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따라 그린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고대의 무덤은 곧 오늘날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곳엔 많은 ‘시대(period)’들이 있지만, ‘시간’은 없다. 이 영원성은 갤러리에 일종의 림보 같은 지위를 부여한다. 거기 있기 위해서는 이미 죽어있어야만 한다”라고 한 브라이언 도허티의 ‘화이트 큐브’에 대한 통찰에서도, 흐르는 시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공간,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 혹은 영원과 연결되는 종교적 공간에 대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브링리 역시 “메트는 그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늘 세속의 교회와도 같았다”(136), 혹은 “그것은 ‘속세와 떨어져 있다’라는 의미의 “성스러움”이었다”(151), “매트라는 웅장한 대성당”(181) “예술과 고요의 신전”(251)등의 표현들을 통해 그가 스스로 선택한 이 애도의 공간이 비일상적이고 성스러운 공간임을, 그리고 그것이 종교적 공간에 비유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사실 미술관을 ‘교회’나 ‘신전’에 비유한 것은 이미 근대 미술관의 초창기인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괴테는 드레스덴 갤러리를 방문하면서 이를 “신전”에 들어가는 경험에 빗대어 서술했고, 영국의 비평가 윌리엄 해즐릿도 루브르는 미술의 “성소”라 부르고 이를 방문하는 것이 일종의 종교적 “순례”와 같다고 표현한 적 있다.


그러나 미술관이 이처럼 종교의 신전에 비유될 수 있는 성격들을 지니고 있는 것과 별개로 실제로 미술관에서 종교적인 의례 행위를 하는 것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세속적 공간인 미술관/박물관은 문화유산을 연구, 수집, 보존, 해석 및 전시하는 공간이기에 여기에 다양한 많은 종교적 유산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종교의 공간에서처럼 의례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 첼시에 위치한 불교미술관 루빈 미술관(Rubin Museum of Art) 4층 <티베트 불교 사원> 방 앞에는 “실제 염주를 손에 들고 사원에서 예배자들이 기도했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라”라고 되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프, 돈 등 봉헌물을 바치는 행위는 삼가”해달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 루빈 미술관은 불교미술 및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고 또 다양한 미디어 및 장치들을 통해 관람객들이 실제 불교의 물질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헌물을 바친다”는 노골적인 종교적 행위는 분명히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은 이렇게 미술관이라는 맥락에서 재구성된 ‘사원’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공간을 또 실제 종교적 공간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관람객들도 간혹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예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에도 나온다. 브링리가 이슬람 전시관에서 근무하던 때, 한 무슬림 방문객은 무슬림 예배자들에게 메카의 방향을 알려주는 벽감 미흐라브(Mihrab) 앞에서 이 벽감이 실제 동쪽을 향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관람객은 그 앞에서 기도해도 되냐고 물어본다. 브링리는 “네, 물론이죠. 히지만 다른 관람객들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니 엎드리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책에 따르면, 관람객은 감사를 표하고 두 손을 모은 상태로 미흐라브를 바라보고 잠시 동안 기도를 하고 장소를 떠났다고 한다.


브링리가 묘사하듯 미술관에서 자신의 종교와 관련된 유물을 보고 이에 종교적 의례를 행하거나 신심을 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예들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연구자이자 미국 볼티모어의 월터스 미술관(the Walters Art Museum) 디렉터를 지낸 게리 비칸(Gary Vikan)은 1988년 월터스 뮤지엄에서 “거룩한 이미지, 거룩한 공간 Holy Image, Holy Space” 전시가 열렸을 때, 매일 밤 전시가 끝난 후 엘 그레코의 <성흔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그림 앞 보호 유리에 남겨진 입술 자국을 닦아내야만 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이 공간이 성당이 아닌 미술관이고 여기에 걸린 그림은 예배를 위한 이콘이 아니라, 특별전을 위해 전시된 예술작품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 프란체스코의 손에 입을 맞추려고 했고 그 결과 그림을 보호하는 유리에 입술 자국이 남게 된 것이다 (그림 앞에 보호 유리를 씌운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스티브 번즈 Steph Berns는 이러한 행위가 그리스도교 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전통과 관련된 전시물과 관련해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데, 그에 따르면 스미스소미언 뮤지엄 아프리카 관의 Beninese shrine 에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봉헌물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며, 뉴욕 아프리카 미술관에서도 관람객들이 동전을 봉헌물로 남기고 간 것이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직접 성물을 가져와서 미술관에 있는 성화나 성물 앞에서 그것을 꺼내어 기도하거나 축복받고자 하기도 한다.


관람객들의 이러한 자발적 종교적 행위가 논란이 되는 지점은 공공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의 질서 유지와 소장품의 보존과 관련된 문제다. 즉 우선적으로 브링리가 무슬림 신자에게 대답했듯이 이들의 종교적 행위가 다른 관람객들의 동선을 방해하거나 그들을 불편하게 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때의 불편함은 실제적인 관람에 방해가 되는 경우와 또 심리적인 불편함을 야기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으며, 이때 후자의 경우는 좀 더 미묘한 문제가 된다. 한편 관람객들이 봉헌물을 바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행위가 유물에 손상을 줄 가능성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하지만 관람객들의 자발적 종교적 행위는 관람객이라는 행위자의 전시물에 대한 능동적 행위, (라투르의 ANT 용어를 쓰자면) “번역”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캐롤 던컨의 책 <미술관이라는 환상>이 잘 지적하듯이 근대 서구 미술관은 과거 종교적 의례의 형식과 틀을 빌려온 새로운 근대 국가의 미술관 의례를 탄생시켰다. 이 근대 국가의 미술관 의례에서 관람객들은 정해진 규율에 따라 특정한 태도를 갖추고 특정한 몸가짐으로 관람하는 미술관 의례를 행할 것이 기대된다. 관람객들이 이 정해진 미술관 의례에서 일탈해서 전시물을 종교적 맥락에서 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미술관과 전시의 의미가 정해진 질서와 이념에 따라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능동적 행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미술관/박물관이라는 장소에 놓인 많은 전시물들이 지닌 ‘원래의 종교적 맥락’을 전시의 형태를 통해 새롭게 환기하고 재맥락화하는 작업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갈라 포라스-김의 작품은 미술관에 들어와 전시품이 된 과거 종교적 유물들의 원래의 성격을 탐구하고 이를 전시장의 맥락 속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그녀는 영국 박물관에 소장된 이집트 가자의 제5 왕조의 석관 창문이 고대 이집트 종교의 원래 관습대로 동쪽을 향해 재배치될 것을 제안했었다. 전시장에는 그녀가 이때 영국 박물관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와 더불어, 석관이 놓인 방향에서 회전되어야 할 거리를 나타낸 화살표, 그리고 실제 석관을 복제한 작품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고대 이집트학 학자가 고대의 악기를 재현한 악기소리에 맞춰 부르는 찬가가 흘러나온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옆에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고대 석비의 스케치 및 영국 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된 곰팡이 포자를 번식시킨 감자즙배지 역시 걸려있다는 점이다. 갈라 포라스-김의 작업은 과거의 종교적 유산의 보존, 연구, 전시 공간으로서의 미술관/박술관이 마치 겹겹이 쌓인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지닌 양피지, 팔림세스트처럼 작동하는 새로운 성스러움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은 종교적 오브제가 지닌 오래된 과거의 시간의 층위(동쪽으로 창문이 놓인 석관), 그리고 그 위에 더해진 이후의 많은 해석과 재해석의 시간의 층위(소장품의 스케치, 고대 악기 및 찬가의 재현), 나아가 미술관이라는 공간 수장고에서의 시간의 층위(미술관에서 생겨 난 곰팡이 포자의 번식)까지 생각해보게 한다.


많은 종교의 유물들이 종교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미술관과 박물관에 놓이게 된 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제 종교의 공간보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술관과 박물관이 기존의 종교 공간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관과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맥락에 놓인 종교적 유물들의 먼 과거를, 그리고 그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들어 온 비교적 근래의 과거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그래서 그러한 유물들과 우리가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맺어 가고 있는지 돌이켜보게 하는 작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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