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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pr 29. 2020

키다리 아저씨 같은 글쓰기

어제 오래간만에 동기와 저녁을 했다. 늘 같은 팀과 식사를 하는데, 일에 지쳐서인지 침묵이 흐른다. 가끔은 편하게 수다도 떨면서 밥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회사 후문에서 만나 메뉴를 고민했다. 우리 팀은 다들 아재라 국밥과 찌개를 벗어나지 못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열심히 고민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함이란 벗어던지기 어려운 것 같다. 결국 정한 곳이 쌀국수였다. 그래도 밥이 아닌 면을 선택한 것이 어딘가. 호기롭게 쌀국수 대자 2개를 시켰다. 허거덕. 거대한 그릇 안에 담긴 끝없는 면의 향연이 잠시 말을 잃었다. 오늘 안에 다 먹을 순 있겠지.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이런 식사 자리가 얼마 만인가. 내가 내뱉는 말이 한도 초과다. 마치 밥이 아니라 말이 고픈 사람 같았다.

동기는 나보다 2살 어린 동생이다. 워낙 사근사근하니 사람을 잘 챙긴다. 말도 잘 통해서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간 서로 엇갈리다 이번에 같은 근무지에서 만났다. 비록 부서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었다.

문득 동기 얼굴에서 그늘이 비쳤다. 무슨 일 있냐고 물었더니 요즘 허무하단다. 워낙 밝은 친구라 놀랐다. 그저 열심히 살았는데, 마음속에 공허함이 비집고 들어와 힘들다고 했다.

그 표정만 보아도 어떤 상황일지 짐작되었다. 내가 그랬었으니깐. 나도 지금 동기 나이 때쯤 주체 못 할 공허함이 밀려왔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통째로 부정되는 느낌. 어떤 것도 위안이 되지 않는 상황.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었다. 그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것이 글쓰기였다.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상상조차 못 하겠다.

동기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나는 글쓰기를 권했다. 그저 한 줄 끄적여도 좋으니 써보라고 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나 심정을 솔직하게 담아내면 좋겠다고 했다. 동기는 알겠다고 답했다. 물론 할지 안 할지는 전적으로 동기의 몫이다. 나는 그저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전하면 된다.

돌아오는 길, 사색에 잠겼다. 인생이 뭐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이 없는지를 느꼈다. 그냥 중년이 되면 좋으련만. 통과의례처럼 다가오는 허무함이 야속했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참.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한다. 어쩌면 반 이상 남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할지도.  동기도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워낙 힘이 있는 사람이니 곧 기운 차릴 것이다. 다만 혼자 안고 가려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글 쓰는 행위 자체로 감사했다. 어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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