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다. 나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으며 낭랑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몇 곡을 그냥 흘려보내다 어느 음이 계속 신경 쓰였다. 궁금한 마음에 책을 덮고 딸에게 가보았다. 딸은 내가 왔는지도 모른 체 피아노에 열중했다. 희고 통통한 손은 연신 건반 위에서 춤을 췄다. 그 손을 따라가다 묘하게 나를 건드리는 음을 찾았다. 바로 '미'였다.
음의 시작을 알리는 '도'도 아니고 고음의 '파'나 '솔'도 아닌 '미'라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나의 음이었다. 나는 점차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던 번뜩이던 눈빛은 푹 꺼진 어두운 눈동자만 남았다. 닿으면 델 것처럼 뜨거운 가슴속 불덩이는 사그라진 지 오래다. 그저 하루를 버티고, 견디는 나만 남았다.
거울 속 나를 보면 안쓰럽다. 조금씩 삐져나오는 흰머리, 불쑥 튀어나온 배, 탄력 없는 살갗. 그래.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지. 그보다도 괴로운 건 어중간한 마음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몹시 두렵고, 가슴 뛰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은 그냥 그런.
부수고 싶다. 터트리고 싶다. 건반의 '도'를 치며 막무가내로 시작하는 거야. 손가락 가득 힘을 주고 건반의 '솔'을 치며 크게 내지르는 거야. 그냥 다 타버려 재가 되어 없어져도 좋아.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때의 내가 되는 거야.
비록 현실은 주저하는 건반의 '미'일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