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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10. 2020

첫 술은 빨간 맛

어린 시절 치기 어린 도전

술맛은 참 오묘하다. 그날 기분에 따라 꿀보다 달기도 하고, 한약보다 쓰기도 한다. 한때는 내가 술을 먹는지 술이 나를 먹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먹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회식이나 모임에서 먹는 술이 맛없다. 다음날이 걱정되는 것 보니 이제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때도 때이니 만큼 집에서 혼술 하는 시간이 즐겁다. 특히 편의점 세계 맥주는 4개에 만원이라 자주 이용한다. 

첫술은 제사 때 음복이었다. 아버지가 먹으라고 해서 한 잔 먹었더니 이건 뭐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서 뱉고 나서도 한동안 입안이 얼얼했다. 어른들은 이게 뭐가 맛있다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걸까? 이해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아버지가 음복하라고 주시면 이리저리 빼기 바빴다. 특히 유도선수였던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집에 와서 나를 불러 바닥에 메다꽂 해서 무서웠다. 자연스레 술은 경계대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짝 친구가 3명 있었다. 메기, 오서방, 변. 우리는 늘 상 붙어 다녔다. 그러나 나와 메기는 M 중학교로, 오서방과 변은 K 중학교로 입학하게 되어 떨어지게 되었다. 사는 동네가 그리 멀지 않아서 가끔 만나서 놀 곤 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 모두 외박도 허락받았다. 우리 중에서 키도 제일 크고, 정신연령이 10 정도 높았던 메기가 제안을 했다.

“애들아. 우리가 중학교 입학해서 반 학기를 무사히 마쳤는데, 뭔가 기념해야 하지 않을까. 어른들 보니깐 그럴 땐 술 한잔하던데. 우리도 한잔할까?” 그때 소심한 변이 나섰다.
“술도 없고, 그러다 걸리면 어떻게 해? 난 싫어.”
“자식. 소심하긴. 정식으로 허락받고 먹어야지.” 그리곤 나를 쳐다보았다.

뭐? 이 자식들이 우리 엄마가 얼마나 무서운데. 나 보러 술 먹겠다고 이야기하라고?’ 계속 저항을 했지만, 이미 친구들은 한마음이 되어 나를 몰아붙였다. 결국 메기와 함께 안방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갔다.

“엄마. 할 말이 있는데. 저....... 오늘 친구들이랑 술 먹어도 될까요?” 그리곤 눈을 잘 끔 감았다. 메기 이 녀석은 아까의 당당함은 어디 갔는지, 내 뒤에 숨어 어머니 눈치만 살폈다.
“뭐? 술? 이 녀석들이.” 난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래. 이놈들아. 한번 원 없이 마셔봐라.”

그리곤, 어머니는 맥주, 소주, 막걸리를 사오셨다. 안주도 맛있게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방에 앉아 신기한 듯 술을 바라보았다. 오서방이 어설픈 모습으로 맥주병을 땄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본 것은 있는지 서로 술을 따라주었는데, 거품만 가득하고 연신 술이 잔 밖을 탈출하였다. 간신히 잔을 다 채우고, 건배를 하고 한잔 거하게 들이마셨다.

어떻게 이 맛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릴 때 음복했던 그 쓴맛과는 다른 시원 씁쓰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배 속에 퍼졌다. 일탈의 즐거움일까, 쓴맛보다는 달콤함이 느껴졌다. 다들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소주도 따서 마셨다. 소주는 맥주보다는 썼지만, 이미 혀는 어느 정도 마비가 되었다. 연신 맥주와 소주를 마셔댔다. 그러던 중 변이 흔들지도 안은 체 막걸리를 열었다. 막걸리는 맥주와 소주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살짝 단맛이 입가에 도는데 정말 맛있었다. 맥주와 소주로 텁텁해진 입안을 헹궈주는 느낌이랄까. 맥주 먹고, 소주 먹고, 막걸리 먹고. 주량도 모른 채 우리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술을 들이켰다. 그러기를 한 참,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필름이 끊긴 것이다.

눈을 떴다. 이상하다. 땅이 하늘이고, 하늘이 땅이다. 눈앞이 뱅뱅 돌았다. 속은 울렁거리고 배 속의 음식물들이 바깥세상 구경하자고 난리를 쳤다. 간신히 주변 지형물을 이용하여 화장실로 갔다.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변기 속에 떠나보냈다. 방에 가보니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시간은 대략 오전 11시. 나는 다시 정신을 속으로 빠져들다 눈을 떴다. 아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속도 쓰렸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친구들은 가고 없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어머니께서 숙취 해소 약을 사다 주셨다. 그것을 먹는 순간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배 속은 더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한심했는지 5천 원을 주면서 동네 목욕탕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간신히 목욕탕에 가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먼 우주로 떠났던 정신이 그제야 조금씩 지구로 돌아왔다. 1시간 정도 땀을 빼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였는데, 친구들 시체처럼 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한동안 우리에게 술은 금기어였다. 우리의 첫 술은 아픈 상처만 남겼다.        

모든 첫 경험이 행복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날 덕분에 술의 무서움을 뼛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치기 어린 우리의 첫 도전.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 친구들 만나면 술상의 좋은 안줏거리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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