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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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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Nov 05. 2020

걷기 위해 출근한다.

걷기에 중독되다.

"형님 오늘 콜?"


아침부터 메신저 빨간불이 반짝인다.


"당근 콜!"


회사 동기이자 두 살 아래 동생인 A의 걷기 제안이 왔다. 아침부터 가슴이 들썩인다. 오늘은 중간에 쉬면서 김밥 먹는 것도 생략하기로 했다. 간단한 것을 준비할 테니 걸으며 먹자고 했다. 1초라도 걷는 시간이 아깝다는 말에 공감했다.


회사의 유일한 장점 중 하나가 1시간 반이라는 장대한 점심시간이다. 11시 25분에 트래킹화로 갈아 신고 슬슬 정문으로 내려갔다. 동기는 미리 도착해 씩 하는 미소를 보였다. 그리곤 주머니를 주섬거리더니 삶은 계란 두 개와 베지밀을 꺼냈다. 우리의 점심이구나. 얼른 받아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시원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걷기 딱 좋은 날이었다. 수명을 다하고 떨어진 단풍이 끝도 없는 옐로 로드를 만들었다. 폭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꾸리 한 냄새가 올라왔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억압된 마음을 분풀이라도 하듯 끝없는 수다의 향연을 펼친다. 오늘의 주제는 삶과 죽음이다. 걸으며 보이는 알록달록 아름다운 풍경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앞으로 이 풍경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서른 번  더 볼 수 있을까?"

"그러게요. 어쩌면 몇 번만 더 보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 맞다. 내일 간들 조금만 놀랄 나이가 되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이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으면서 머릿속은 감성에 푹 빠진 아이러니였다. 


이제 막 아파트 사이 길을 지나 공원 초입에 진입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머니에서 계란을 꺼냈다. 걸으며 먹으니 목이 메었다. 베지밀을 꺼내 빨대를 꽂고 쪽쪽대는데, 순간 눈앞에 펼쳐진 그림에 말을 잊었다.

아. 조퇴하고 싶다. 이 아름다움을 잠시만 탐닉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서글픔이 차올랐다. 동기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생의 화두를 꺼냈다.


"형님. 제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매일매일 데이터를 백업해서 죽기 전에 다른 몸에 들어가 정신은 소유한 채 살아가는 겁니다. 대신 엄청난 돈이 필요하고요. 이렇게 사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영화 속에서 흔히 다룬 내용이었다. 영원히 산다. 죽음이 두렵기는 하나. 삶의 종착지가 있기에 지금 내 눈에 담고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죽지 않는다면 소중함도 점차 그 빛을 잃어갈 것 같았다.


영생의 바다를 건널 때쯤 이미 한 시간이나 걸었다. 이마에 땀도 송글 맺혔다. 공원 곳곳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어찌나 다들 행복해 보이는지.  시간에 그런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로또라도 되면 나도 누릴 수 있으려나.


이제 다리를 건너 공원 출구로 다가갈 때쯤 강가에 반짝이는 무언가에 넋이 나갔다. 밤 새 내려앉은 별빛이 미쳐 하늘로 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듯 보였다. 황금 다리를 건너 저 끝까지 가고픈 충동을 간신히 다잡았다.

장딴지에 짱짱함이 느껴졌다. 발바닥도 슬슬 불이 났다. 많이 걷했나 보다. 등에도 땀이 송글 맺혔다.


공원을 지나 도시의 입구가 보였다. 이때 동기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만약 매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오늘 너 왜 이러니.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은 또 뭔지. 뭘 하면 좋을까.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 마시기. 공원 산책하기. 여행 떠나기. 다 좋지만, 매일 똑같이 반복한다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집에 있겠다고 했다. 동기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실화냐?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말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회사 정문을 통과한 뒤 스마트 워치 정지 버튼을  껐다. 핸드폰으로 이동거리를 확인하고 놀랐다. 무려 8km가량을 걸었다. 2만 보가 조금 넘었다.

걷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 지루할 틈도 없었다. 나올 때 어깨 가득 뭉쳤던 근육도 스스로 풀렸다. 걸으니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지만, 이겨낼 힘을 얻었다.


이제 동기와 헤어질 무렵, 이번엔 내가 물었다.


"내일도 걸을까?"

"하하. 좋습니다. 안 물었으면 섭섭할 뻔요."


녀석. 말도 예쁘게 하네. 덕분에 마음에 품은 설렘을 놓지 않았다. 내일은 공원 말고 가로수 길 따라 가봐야겠다. 길게 이어진 길이 궁금했다.


걷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닌 건지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걷는 것이 참 좋다. 거기에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기쁨은 배가 된다. 걷다 보면 내 안에 가득 찬 고뇌들이 스르륵 사라진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부지런히 걷고 또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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