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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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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Nov 18. 2020

선배는 종교가 싫다고 했었지.

사람이 변하면 큰 일 난다는데.

"종교를 가져보면 어떨까?"


주말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와 만남을 가졌는데,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교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모터 돌아가듯 열을 올리며 비판을 쏟아내던 분이 웬일인가 싶었다. 


선배는 묵묵히 본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꼭 될 줄 알았던 승진에서 미끄러지고, 심란한 차에 우연히 절에서 하는 템플 스테이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스님은 "안이든 밖이든 똑같아요. 여기도 주지 스님이 못되어 병원에 누워 있는 분이 계세요.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마치 선배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해서 깜작 놀랐다고 했다. 그리곤 스님이 되어도 좋을 관상이라고 말해주었다는데. 나는 혹시 영업하는 것 아니냐고 농을 던졌다. 선배는 엷게 웃으며 그곳에는 진짜 노승만 가득했다고 한다. 민머리에 목탁을 들고 있는 선배를 상상하곤 흠짓 놀랐다.


늘 새벽에 일어나 허겁지겁 준비하고 나갔다. 출근해서도 어떻게 시간이 지나는지 모르게 바쁜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하고, 불경 듣고, 산책하고, 사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도 하루가 지나자 금세 사그러 들었다. 천천히 살아온 삶을 돌아보니 울컥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회사가 전부였고, 그곳에서의 성공이 가족 모두의 행복이라 생각했었다. 악착같이 살았는데 남은 것은 대면 대면한 아내와 이미 멀어져 버린 아이들 뿐이었다.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낼 걸. 직장 외에 다른 취미 활동이라도 해볼 걸. 여행도 실컷 다녀볼 걸. 후회는 눈덩이처럼 커져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그늘이 잔뜩 드리운 선배의 얼굴에 왜 자꾸 내 모습이 겹치는지. 늘 당당하던 어깨도 오늘따라 좁게만 느껴졌다. 호프집에서 건배사 대신 절에 다니며 마음공부를 하겠다며 술잔을 부딪히는 모습이 낯설어도 좋았다.


500cc 호프 두 잔에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지하철을 탔다. 구석 자리에 앉아 선배와의 시간을 곱씹었다. 얼마 전부터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이 그새를 못 참고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휴직이다. 10년이 훌쩍 넘은 직장 생활 동안 그 흔한 병가 한 번 쓰지 않았다. 승진하고 싶은 욕심에 1년 전 본사에 와서 맞지도 않는 업무를 하며 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의 말처럼 하루살이가 된 기분이다. 쓰고 싶은 글은 시간에 쫓겨 주말에나 간신히 끄적인다. 쉼이 간절히 필요하다. 물론 불가능한 희망고문일 뿐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가 시작될 첫째의 학원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이사로 인해 받은 대출은 어떡할 것이며 쉬는 동안의 뾰족한 계획도 없다. 무엇보다도 아내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


중년이란 이런 것일까. 젊을 땐 이 나이가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할 수 없음에 갇혀있다. 균열을 내고 싶다. 선배처럼 잠시 멈추는 시간이라도 가지면 어떨까. 분명 중요한 것이 보일 것 같은데. 용기도 늘어난 뱃살 속에 묻혔다.


무신론자였던 선배의 신자 선언이 적잖이 파장을 몰고 왔다. 그나저나 사람이 변하면 큰 일 난다는데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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