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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Nov 14. 2020

앉아 싸도 괜찮아.

40년이 넘은 습관과 아쉬운 작별하기

바지를 내린다. 동그란 원을 지긋이 쳐다본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복부에 힘을 빼려는 순간, 아차차.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어제의 아내 목소리가 화장실 문을 넘어 전두엽을 때렸다.     


“여보. 이사도 했으니 이제 소변은 앉아서 보았으면 좋겠어. 남자들이 서서 소변볼 때 정말 많이 튄데. 위생에도 안 좋고. 청소 담당은 나니깐 알겠지?”   

  

아내의 부탁을 거절하기엔 새로 산 변기가 눈처럼 하얗다.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답했다. 서서 싸는 44년간 지켜온 자존심이었다. 네발로 기던 아기 시절을 졸업하고, 두 발로 당당하게 설 무렵부터 숙명과도 같았다. 아주 멋 옛날, 사냥터에서 적을 감시하며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된 행동 양식은 아니었을까. 별의별 이유를 대며 부정하고 싶지만 더는 사바나 초원을 거닐던 수컷이 아니었다.  

       

쉬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서 비장함마저 돌았다. 8초, 9초, 10초, 눈을 질끈 감고 뒤돌아 앉았다. 귓가에 진주의 노래 ‘난 괜찮아’ 흘렀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아무리 약해 보이고 아무리 어려 보여도 난 괜찮아♬”        


그래. 난 괜찮아.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잖아. 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니야. 넓적 다리에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몸에 힘을 뺐다. 묘한 기운이 온몸 가득 퍼졌다. 그래도 일어서지 않았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은색 버튼을 눌렀다. 그제야 몸 안에 가둬두었던 한 숨을 크게 내 쉬었다.     


“여보. 나 앉아서 소변보았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화장을 지우던 아내는 눈에 반달을 띄우며 폭 앉아주었다. 그리곤 입술에 쪽 하고 뽀뽀도 해주었다. 이게 웬 횡재란 말인가. 에헤라디야. 어깨춤이 절로 나오네.


입가에 따스한 기운을 머금고 다짐했다. 앉아서 소변보니 다리에 힘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 그간 미련하게 왜 서서 보았을까. 진작에 실천하고 사랑 듬뿍 받을걸.     


앉아 싸도 괜찮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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