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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Dec 19. 2020

그 어느 때보다 소박한 그 날

연말이 연말 같지 않네.

지금쯤 바글대는 술집에 앉아 인생의 기쁨, 슬픔을 술잔에 담아 보내야 했다. 현실은 저녁 6시가 다 되었건만, 잠옷 바람에 씻지도 않은 체 멀뚱히 의자에 앉아 있다. 오늘 누적 걸음 수는 249.     

 

퇴근하고 돌아온 아내가 마라탕에 닭강정을 사 왔다. 오호라. 술안주였다. 얼른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한 잔 할래?”라는 말에 아내는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혼 술이 제맛이지. 맥주를 먹기 위해 태어난 잔을 찻장에서 꺼냈다. 콸콸콸 쏟아지는 노란 물결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땅콩 소스가 바탕인 고소하고 화한 마라탕 국물과 쫀득하니 식감 좋은 닭강정을 안주 삼아 들이켰다.      


두 잔 반쯤 마셨을까. 조명이 세 개로 보이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해졌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극렬한 REM 수면의 단계에 진입했다. 눈을 떠보니 첫째 어깨에 가녀린 모가지를 기대고 있었다. 무려 한 시간이 흘렀다. 맙소사.      


그간 술자리가 없으니 술 마실 일도 없었다. 주량이 하향곡선을 찍고 맥주 한 캔에 멈추었다. 그게 뭐라고 머리도 띵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트레이닝 바지 사이로 비집고 나온 뱃살을 도로 넣으며 운동을 다짐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데 아이들도 함께 가겠다고 졸랐다. 첫째가 옷 갈아입는데 10분, 둘째가 화장실 다녀오는데 10분, 도합 20분이 지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찬 바람이 불었다. 마스크 때문에 안경에는 연신 습기가 찼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김 서림 방지 클리너를 샀다. 지금이 적기였다. 안경을 닦아 보았다. 신기하게도 시야가 금세 맑아졌다. 그게 뭐라고 기분이 한 움큼 좋았다. 룰루랄라 걷는데, 하얀 장벽이 가로막았다. 급기야 앞을 볼 수 없었다. 마법은 5분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음식점마다 한두 자리 외에는 텅 비었다. 그나마 반짝이는 조명이 연말임을 상기시켰다. 그래도 기념이라고 사진 몇 장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최고네.”란 답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뭐람.     


바깥바람이 허파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스마트 워치에 찍힌 숫자는 4,520. 목표했던 5,000에 480걸음이 부족했다. 집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채워지겠지.      


암울했어도 연말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구렁이 담 넘듯 보내곤 싶진 않다. 힘든 시기를 별 탈 없이 보냈다. 나와 가족에게 조그만 보상이라도 주고 싶다. 다음 주에는 구석 어딘가에 먼지가 잔뜩 묻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고, 그에 어울리는 전구도 사서 꾸며야지. 아이들 선물은 창고에 숨겨 두었는데, 그때까지 들키지 말아야 한다. 아내가 바라는 것도 슬며시 탐색하고, 나도 사줄지 모르는 스마트폰 목 거치대를 기대하며 소박한 그 날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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