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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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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Dec 17. 2020

연가 갈 때 회사 전화를 착신한 죄

다음엔 기필코 모두 두고 오리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서류뭉치를 멀뚱히 쳐다본 후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 연가 낼까?”     


바쁜지 한참을 지나서야 답이 왔다.     


내일 애들끼리 있는데 필수는 아님.”  

   

애매하다.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이럴 땐 합리화가 최고지.

    

애들만 두기 그러니깐 내가 연가를 낼게.”   

  

과장님께 보고를 마친 후 연가를 쓰겠다고 말씀드렸다.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연말의 이 엄중한 시기에 연가라니. 떨떠름한 표정 속에 부정이 가득 담겼다. 이미 주사위는 던졌고, 얼른 시스템에 연가를 입력했다. 사유는 ‘가사정리’     


하던 일을 마무리하니 벌써 저녁 9시가 다 되었다.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주섬주섬 가방 속에 일감을 넣는 심리는 무언지. 보지도 않을 거면서. 묵직한 가방을 들고 이제 막 컴퓨터를 종료하고 나가려는데 눈앞에 검은색 전화기가 아른거렸다. ‘한창 바쁠 때라 연락 올 곳이 많을 텐데. 어쩌지.’, ‘괜찮아. 그냥 가. 별일이야 있겠어.’ 두 개로 나뉜 마음이 갈등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전화기 착신 버튼을 눌렀다. 나도 참.     


여러 생각들로 잠이 오지 않았다. 괜스레 핸드폰만 뒤적거리다 무의미한 시간만 흘려보냈다. 슬럼프라도 온 걸까. 일, 가정, 글,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다. 끝을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 불안했다. 이런 시기에 연가는 도피성이 분명했다. 피곤이 쌓인 새벽 무렵에야 잠이 들었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다. 아침부터 회사로부터 연락이 쏟아졌다. 급히 처리해 달라는 요청에 노트북에 깔린 업무망에 접속했다. 일에 집중하던 중 아이들 생각이 났다. 첫째와 둘째를 깨워 온라인 수업 준비를 시켜야 했다. 아내는 출근 전 몇 가지 사항을 당부했었다. 촘촘한 스케줄을 하나라도 잊을까 봐 카톡에 저장했다.      


업무를 마무리할 때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밥을 챙겨주고 잠시 책을 읽었다. 평온을 찾을 때쯤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따라 급한 일은 왜 이리 많은지. 회사 동료에게 착신을 풀어달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국 연가는 일 반, 아이들 챙김 반으로 끝나버렸다. 누구를 탓하랴. 전화기를 착신 한 나의 죄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오늘 처리한 일로 내일이 덜 부담된다는 것이다.      


오늘로써 확실히 깨달았다. 연가 갈 땐, 일감도 전화도 회사에 두고 오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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