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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an 03. 2021

퀸스 갬빗의 환영을 나도 보았다.

천장에 체스 말이 아닌 다른 것이.

자욱한 연기 사이로 빨갛고, 하얀 공이 부딪쳐 내는 파열음이 귀를 때렸다. 멋들어지게 담배를 입에 문 2학년 선배는,


“너희들도 한 번 쳐볼래?”     


라고 물었다. 우물쭈물하는 우리 앞에 가늘고 기다란 막대기가 다가왔다. 왼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푹신한 녹색 테이블 위에 놓고 잔뜩 힘이 들어간 오른손으로 큐를 잡고 힘차게 밀었다. 기대와 달리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여태껏 공을 들고뛰고, 던지고, 달리는 것만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당구를 만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수학 공식 같은 공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때부터 당구가 새내기 시절을 지배했다. 수업 중간에 있던 공강 시간은 떼로 몰려가 당구를 쳤다. 아니 때론 수업도 빠지고 당구장에 갔다. 점심시간이 되면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역시 시간과 돈이 정답이었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동기 중 한 명은 소형차 한 대 값을 오롯이 쏟아부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아르바이트하며 힘들게 벌었던 용돈 중 일부는 고스란히 사각의 링 안으로 사라졌다.     


그날도 늦게까지 당구를 치고 집에 돌아왔다. 씻고 누웠는데 잠이 쉬 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였다. 나와 K는 2시간의 혈투를 마칠 마지막 샷만을 남겨 두었다. 동기들은 숨도 쉬지 않은 채 우리 주변을 에워쌌다. 드디어 내 순서가 돌아왔다. 공의 위치는 나쁘지 않았다. 평소에도 수도 없이 성공했던 패턴이었다. 샷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 아차 했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 버렸다. 이어진 K의 샷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게임을 마무리 지었다. 탄성이 곳곳에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오후의 혈투가 하얀 천장 사이로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빨간 공이 하얀 공을 맞고 흩어졌다. 4개의 공은 내 눈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마범처럼 움직였다. 마치 당구장에 다시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날 밤 천장을 보며 실수를 두고두고 복기했다.      




코로나 19 확산세 증가로 주말에는 내내 집콕이었다. ‘오늘은 뭘 먹지?’에 이어 ‘오늘은 뭘 하지?’가 화두였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줌으로 연말 모임을 마친 아내가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작품을 추천받았다고 했다. 제목이 ‘퀸스 갬빗’이었다. 총 7부작이고 한번 보면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의미인지조차 예측할 수 없는 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나중에야 알았다. 퀸스 갬빗은 체스에서 오프닝의 한 종류로 첫수를 의미했다.          


주인공 베스의 어머니는 차로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나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로 인해 보육원에 들어가게 된다. 낯선 환경 속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던 베스는 우연히 지하실에서 홀로 체스를 두는 관리인 샤이벌을 보게 된다. 운명처럼 체스에 이끌려 알려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체스를 배우게 된다. 보육원에서는 매일 원생에게 알약 두 개를 주는데 그중 초록색 알약은 진정제였다. 보육원에서 유일한 말동무가 된 졸린은 저녁에 먹으라고 조언을 한다. 잠자리에서 그 약을 먹은 후 천장에서 체스판이 살아 움직인다. 그 장면을 보며 대학 때 당구공이 천장에서 보였던 것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이 드라마 몹시 빠져들 것 같은데.    

  

베스는 샤이벌의 도움으로 실력이 나날이 발전한다. 그러던 중 입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생의 2막을 맞이한다. 여전히 학교와 집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중 양부모가 이혼한다. 남편의 지원이 끊기고 좌절하던 새엄마에게 베스는 체스 대회를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대회 참가비가 없던 베스는 샤이벌에게 편지를 써서, 돈을 빌린다. 주 대회에서 우승한 후 본격적으로 체스 선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새엄마도 이후에는 매니저로서 베스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체스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중 엄마가 돌연사한다. 이후 베스에게는 큰 위기가 찾아오고, 그 속에서 마지막 도전을 준비하는데….     


체스에 ''자도 몰랐지만, 끝까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물론 다 본 후에도 여전히 규칙조차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체스 경기가 주는 짜릿한 승부도 흥미로웠지만 관계가 주는 메시지에 눈이 더 갔다. 어린 베스에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따듯함을 주었던 관리인 샤이벌, 베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나중에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친구 졸린, 베스가 체스만 바라보던 독종에서 다른 삶과 의미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새엄마 앨마, 때론 승부 상대로, 때론 따듯한 마음으로 베스에게 힘이 되어준 동료 해리, 매니, 타운스 덕분에 상처를 딛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여태껏 살아오면서 도움을 준 사람들이 떠 올랐다. 그런 선한 영향력 덕분에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밝음을 돌려줄 때이다. 어떤 거대한 도움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싶다.    

  


천장에서 보았던 당구의 환영은 열정을 의미했다. 이제 고작 인생의 절반을 살았는데, 세파 속에 자꾸 움츠러든다. 아직은 그 빛을 잃고 싶지 않다. 늦었단 생각 말고 꺼져가는 마음에 다시금 환한 불빛을 피워 보자.  이제는 천장에 당구공이 아닌 다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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