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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an 13. 2021

인사 공고

언젠가 꽃피는 봄날이 찾아오겠지.

어제 퇴근 무렵에 눈이 왔다. 한 달에 두어 번 차를 가져오는데 하필 그 날이었다. 아무래도 운전하기 힘들 것 같았다. 수요일에 차를 쓰는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하니 분노의 카톡이 왔다. 집에 가기 몹시 두려웠다.

드디어 인사 공고문이 떴다. 이때쯤이 되면 다들 마음이 들썩인다. 예정일보다 며칠 지나서인지 긴장감은 더했다. 우리 팀 선배 한 분은 이번에 일선으로 돌아간다. 나는 결국 본부에 남기로 했다.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더 버텨보기로 했다. 사실 내가 있기로 한 이유는 선배의 영향이 컸다. 부서장과의 면담 후 마음이 갈팡질팡 했었다. '승진'이라는 보이지 않는 유혹에 흔들렸다. 그때 선배는 차 한잔하자고 했다. 다른 어떤 것 보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을 고정시켰다.

"그래도 실배 계장은 베푸는 일을 하고 있잖아. 나도 힘들 때 그 생각으로 버텼어."

의미가 중요한 나에게 하필 그 말을 해가 지곤. 그때부터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선배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선배는 우리 쪽 업무에 특화된 분이었다. 주어진 일은 군말 없이 밤을 새워서라도 완수했다. 계속해서 본부에 붙들려왔고, 몸이 부서지라 일했다.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벌써 머리카락은 몇 가닥 없고, 몸은 바싹 말라 거죽만 남았다. 결국 이번에도 숫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나빠져 부득이하게 내려가게 되었다. 허리고, 어깨고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이제 이곳 생활도 마지막이라며 얇은 미소를 짓는데, 왜 이리 마음이 짠한지. 길었던 고통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일보단 본인을 먼저 챙겼으면.

베테랑 선배가 떠났기에 남겨진 사람의 몫이 더 커졌다. 험난한 미래가 불 보듯 뻔하다. 나는 나를 지키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주어진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대신 다른 무기를 갈고닦을 것이다. 나에게는 글과 책이 있다. 책 속에 빠져 잠시 고된 현실을 잊고, 헛된 투정이라도 글에 담아 날려보련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은 다시 찾아온다. 그날을 위해서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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