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훅하고 바람이 불어온다.

철은 밥에 말아먹었다.

by 실배

살면서 무뎌진다는 말이 싫다. 알 만큼 알 나이 되었잖아. 결혼도 했고, 직장도 다닐 만큼 다녔고, 더구나 나이도 마흔 중반이야. 이쯤 되면 대충 어떻게 살지 뻔하지. 영혼은 신발장에 잠시 모셔두고 회사에서 시키는 온갖 일은 다 하며 승진만을 꿈꾼다. 남들 다하는 재테크를 쫓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지고, 통장에 점만 찍고 사라진 월급에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이들은 점차 품에서 떠난다. 주말에 외출이라도 같이할라치면 “다녀오세요.”란 말이 폐부를 찌른다. 그나마 아내가 의리로 살아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의 연속이다. 아이참, 재미없네.

사실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책을 읽다 감정이 이입되면 나도 모르게 그 세계 속으로 홀딱 빠진다. 로맨스 , 스릴러, 판타지 장르 불문이다. 그중에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에는 슬쩍 남자 주인공 옷을 입고 눈물, 콧물 쏙 뺀다. 주책바가지다. 음악에도 얼마나 민감한지. 멜론 정액권을 끊어 놓고 틈만 나면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점잖은 노래를 들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20대가 들음 직한 말랑 뽀송뽀송한 곡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맘에 드는 음악이라도 만날 치라면 기분도 덩달아 춤을 춘다. 무한반복은 필수이다.

계절은 날씨가 바뀌는 것 일 뿐인데. 봄은 냄새로 느끼고, 여름은 뜨거워진 심장으로, 가을은 센티한 갬성이 돋아나고, 겨울은 벌거숭이 나뭇가지에 이입된다. 떠나는 계절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쭈글 한 중년 아재 모습을 탑재하곤 소년 마음으로 앓이를 한다. 어디 들킬까 봐 글에만 조그맣게 끄적인다. 마흔 넘게 반복된 일인데, 매 순간 느끼는 감정은 오색빛깔이다.

주말만 목 빼고 기다린다. 집에 오면 바로 페르소나를 홀딱 벗고, 실배로 갈아입는다. '실배것"으로 명명된 네모난 상자 속 노트북을 꺼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은 헤벌려서 조그만 자판을 두드린다. 최근 들어 급격히 노안이 찾아와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돋음 체 10포인트를 고수한다. 이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누가 보면 대단한 글이라도 쓰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구질구질한 일상 이야기이다. 아무렴 어떠냐. 어느 때보다 행복한걸. 글을 마치고 발행 버튼을 누르면 세상 짜릿하다. 어릴 적 빨간 양말 속 산타할아버지 선물을 발견한 흥분이라면 과장이 심하려나. 주말 저녁이 다가오면 학교 가기 싫은 아이 같은 슬픈 표정으로 실배를 옷장 속에 넣는다. 상상만으로도 웃픈 걸.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거야. 나란 존재를 만들 때 '철'이란 중요 요소가 빠진 것이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 이런 철딱서니일 리가 없잖아. 어디 따져볼 때도 없고. 그런데 말이야. 이런 나가 썩 나쁘지만은 않은 걸.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살짝 비켜나 있지만, 세상이 보지 못한 어두운 구석 속 조그만 불씨를 열심히 피운다.

얼마 전 길을 걷다 흐릿한 봄 내음이 코를 스쳤다. 봄이 찾아오려나 보다. 기대할 일도 없음에도 가슴이 몹시 방망이질 쳤다. 봄은 봄 자체만으로 다니깐.

훅하고 바람이 불어온다. 그 존재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런 떨림이 나는 참 좋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흔넷, K의 주름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