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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11. 2021

나의 아저씨

이제 진짜 행복하자.

그럴 때가 있었다. 혹시 내가 지구란 곳에 잘 못 온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싱그러울 20대 초반, 공허함은 수시로 나를 저 땅끝까지 밀어냈다. 나방이 불빛에 모여들 듯 그래서 더욱 사람들이 가득 모인 자리를 쫓아다녔다. 나의 어둠을 감추려는 듯. 뺨이 얼얼할 정도로 웃고 떠들고 돌아오는 길은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곤 했었다. 어떨 땐 주체 못 하는 감정으로 아무 버스나 집어 타고 가본 적 없는 길에 내려 몇 시간이고 정처 없이 걸었다.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러나 이제는 흐릿한 그 시절이 무언가 때문에 다시 소환되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 했다. 주인공 박동훈(이선균)이 이지안(이지은)을 알아보았던 것처럼 둘을 알아챘다. 그것이 태생적이든, 후천적이든 마음 안에 상처를 가득 품었다. 드라마에서 파생된 여러 이야기 갈래 중 내내 서로의 상처를 알아주고, 보듬는 장면들에 깊게 몰입되었다. 그때 나도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을지, 손을 붙잡고 수면으로 올라왔을지는 모를 일이다. 적어도 외로움은 덜 했으리라.


이지안은 어릴 때 어머니가 물려준 빛 때문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할머니와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매일 찾아와 때리고 돈을 뜯는 사채업자로 인하여 거친 세상에 내몰린다. 급기야 할머니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그를 살해하게 된다.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채업자가 된 아들의 분노를 그저 온몸으로 막아낸다. 박동훈은 겉으론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대기업 건설회사 부장이며, 변호사 아내와 살고 있다. 아들은 영어공부를 위해 유학을 보냈다. 늘 만나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형제들과 동네 친구들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은 눈빛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회사 파견직으로 일하는 이지안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쟤 뭔데 나를 아는 것 같지. 우연한 기회에 둘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게 된다. 긴 침묵 속에 간간이 내뱉는 한 두 마디가 정곡을 찌른다. 드라마에 직접 표현되진 않았지만, 그 감정을 안도감으로 정의 내리고 싶다. 나만 잘 못 태어나 세상에 겉도는 줄 알았는데, 나 말고도 너도 그렇구나 하는 그런.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거리를 좁혀간다.


이지안은 돈 때문에 박동훈을 파멸의 구덩이로 밀어내려는 회사 상사 도준영과 손을 잡게 되고, 오히려 그를 지키고자 모든 것을 건다. 이제 그녀는 더는 세상에 벽을 친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씩 온기를 밖으로 내뱉기 시작한다. 극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지만, 끝까지 따스함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에 장면마다 너무 슬퍼 눈물을 계속 흘렸다. 어깻죽지까지 들썩이며 우는 모습에 옆에 있던 아내는 주책이라며 혀를 찼다. 아무렴 어때. 내 마음이 그런 걸.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둘이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며 나누는 대사에 그냥 터져버렸다.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것이 너야.”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이제 진짜 행복하자.”


일상처럼 쓰는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말이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 몰랐다. 그 단어는 모든 것을 치유하고도 남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 말처럼 그들은 이제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숨기지 않고 그려낼 글이란 친구가 생겼다.


‘나의 아저씨’를 보며 지나간 상처를 보듬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맥주 한 잔에 글을 쓰며 행복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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