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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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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12. 2021

사내 둘이 보낸 명절

낯설지만 나름 좋았던.

낯선 명절이었습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로 인하여 가족 모두가 모이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중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나와 아들은 본가를 가고 아내는 딸과 처가댁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양가 부모님이 허락하느냐는 것이었죠. 명절 전날 회사에서 어머니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자며 쿨하게 허락을 하셔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장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요즘 상황을 잘 이해하시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잠잠해지면 다 함께 찾아뵙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길 바라셨다면 어찌할 바를 몰라 발발 동동 굴렀을 텐데 말입니다.


누나네 와 피하기 위하여 명절 전날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아내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처가댁에서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아내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속내는 안 들여보아도 뻔합니다. 감시망이 사라졌으니 마음껏 게임을 하겠지요. 적어도 1시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큰소리로 대답한 것이 수상쩍습니다. 까만색 에코백 안에 딸이 전날 준비한 세뱃돈과 소설책 한 권을 챙겼습니다. 봉투 겉면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안부 인사와 더불어 숫자가 하트 안에 있었습니다. 에구머니나. 금액을 적었네요. 민망스럽게 시리. 그래도 정성이 담겼으니 그냥 가져가야겠지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수한 튀김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새우튀김을 하셨나 봅니다. 손을 씻고 상을 펼쳤습니다. 새우튀김, LA 갈비, 명란젓 찌개가 네모난 상 위를 가득 채웠습니다. 호호 불어가며 개나리처럼 노란 튀김을 입안에 쏙 넣었습니다. 바삭하니 얼마나 맛나던지요. 어머니의 음식은 그 안에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상을 치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들이 이번에 중학교에 입학하니 학교생활이 주된 주제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담배는 절대 피지 말 것.

둘째, 여학생 보기를 돌 같이 할 것

셋째, 열심히 공부할 것


아들은 첫 번째 당부부터 화들짝 놀라면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그래도 수긍하는 눈치였습니다. 한바탕 말씀을 마치신 뒤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네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도 몇 번 담배를 끊으려고 하셨지만 실패하셨다며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술은 나중에 꼭 아빠에게 배우라고 당부했습니다. 오늘따라 아버지, 어머니가 왜 그러는지 원. 나를 예로 들며 아버지께 술을 배웠다고 하셨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을 집에 불러 처음 술 먹다가 술병 났던 것은 까맣게 잊으셨나 봅니다. 그때 술 깨는 약도 사다 주셨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가물가물하네요.


집에 TV가 없는 관계로 부모님 댁에만 가면 아들은 채널 돌리는 재미에 푹 빠집니다. 전에는 얼마나 눌렀던지 그만 고장이 나서 난처했습니다. 몇 번 잔소리를 하다 말았습니다. 눈이 무척 감겼습니다. 집에만 오면 왜 그리 잠이 오는지 모르겠네요. 분주한 아들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났을까요. 아들에게 세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옆에 나란히 서서 부모님께 절을 했습니다. 의젓한 모습이 대견했습니다. 언제 저리 컸을까요. 딸이 준비한 세뱃돈을 드렸는데 살짝 당황은 하셨지만 기뻐하셨습니다.


밥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갈비 떡국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마흔 중반이 되었네요. 한 그릇 뚝딱 비우고 함께 TV를 보았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의 왕국’이 방영 중이었습니다. 주제가 포식자의 사냥법이었는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강가에 사는 거대 물고기는 몸을 낙엽처럼 변신하여 둥둥 떠다니다가 작은 물고기를 발견하면 다가가 한입에 쏙 넣었습니다. 인간도 동물도 모두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걷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버스를 타자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목적은 역시 게임이었습니다. 별 수 있나요. 아들 뜻에 따랐습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습니다. 국산은 세 캔에 만 원, 외국 맥주는 네 캔에 만 원이었습니다. 살짝 고민하다가 국내 맥주를 샀습니다. 뭔지 모를 뿌듯함은 뭔가요. 혹시 애국심?


아들과 순차적으로 씻고 각자의 취미를 즐겼습니다. 저는 거실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잔에 글을 썼습니다. 아들은 안방 침대에 누워 게임과 유튜브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손으로는 게임을 하면서 눈으로는 유튜브를 보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습니다. 오늘은 잔소리 안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냥 두었습니다. 알딸딸하니 글도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저녁 10시 반쯤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영화를 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공포영화였습니다. 겁이 많은 우리는 어느 순간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을 반쯤 감으며 피했습니다. 이러려면 왜 보려고 했는지.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다 보았습니다. 벌써 자정이 넘었습니다. 잠이 쏟아졌습니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꿈나라로 향했습니다.


눈을 뜨니 오전 9시가 넘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늦잠이네요. 아들과 함께 해장국을 먹으러 가고 싶었습니다. 아들은 귀찮다며 그냥 라면을 먹자고 했습니다. 아침부터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서 부엌에 가서 라면을 끓였습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어질러진 집안 꼴이 보였습니다. 청소기도 돌리고, 걸레질도 하고 거실에 아내가 빨래 건조대에 걸어둔 니트도 정리했습니다. 이제는 돌돌이로 먼지도 제거하는 센스도 생겼네요. 집안일을 마치고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을 했습니다. 이 시간이 그리 좋을 수가 없네요.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는 아들을 꼬여서 배드민턴 시합을 했습니다. 이 년간 방과 후 수업으로 배웠다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삼 대 일로 져서 음료수를 샀습니다. 이제는 배드민턴도 그만 쳐야겠네요. 그나마 남은 팔씨름도 이제 곧이겠지요.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우프네요.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제 처가댁에서 출발한다고 하네요. 집에 도착하면 마리오를 가자고 했습니다.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옷을 사준다고 했습니다. 옷에 관심이 떨어져 한동안 사지 않았는데, 공짜라서 그런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떤 옷을 살까 고민했지만 떠오르지가 않네요. 감이 떨어졌나 봅니다. 센스 있는 아내 있으니 걱정은 안 하려고요.


아들과 보낸 명절도 이제 슬 지나가네요. 코로나로 인하여 전과는 다른 일상을 보냈습니다. 이런 말 하긴 그래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저도 아들과 정을 쌓았고, 아내도 며느리의 부담에서 벗어나 오롯이 딸로서 명절을 보냈으니깐요. 명절 후유증도 덜 할 것 같습니다.


땀을 식히려고 테이블에 잠시 앉았습니다. 햇살을 맞으라고 일부러 햇볕에 두었던 하얀 꽃이 무척 아름답네요. 기어이 사진에 담았습니다. 누가 나이 먹은 증거라고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던데. 제가 좋으면 누가 뭐라 한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번 명절은 저 꽃처럼 마음도 몸도 따듯했던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 같네요.


이제 남은 시간은 일상으로 돌아와 가족이 모여 보내겠지요. 글과 함께하는 모든 분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행복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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