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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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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21. 2021

만 보 걷고 기적을 보다.

너무 좋은데 뭐라 설명한 방법이 없네

살 빠지셨어요?


동그란 금테 안경 너머로 놀란 눈이 보였다. 살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 나이 들어 볼 살이라도 빠져 보이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칠 무렵, 그 이유를 알았다. 의사 선생님이 차트로 보여준 총 콜레스테롤 수치가 200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맙소사. 앞에 숫자를 잘 못 본 것 아닌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잘 유지하라는 선생님의 당부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5년 전이었다. 승진 한번 해보겠다고 본사로 올라가 매일 야근과 술에 시달리며 몸을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뒷 목이 심히 당기길래 병원에 갔더니 고지혈증 진단을 받았다. 관리할, 평생 약 먹을까 하는 선택의 순간에 후자를 택했다.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세 달에 한번 병원에 찾아가 피검사 후에 약을 받아 계속 복용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먹었음에도 늘 수치는 제자리였다. 그나마 정상에서 조금 벗어난 수준이었다.


사실 우리 집은 대대로 가족력이 혈압이었다. 친할아버지도 중풍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고혈압으로 고생 중이다.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운동하고 관리했음에도 건강 검진하면 혈액 나이는 10년 가까이 많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마흔 넘으면 분명 찾아올 거라고 예언을 했었다. 무슨 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정확히 마흔이 되는 순간 고지혈증이 나타났다. 두렵고 무서웠다.


뭐가 좋다고 3년 만에 다시 본사로 발령 났다. 다행히 술을 마시는 문화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는 오롯이 일로 채웠다. 매일 야근에 시달리며 몸이 점점 축났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의사 선생님도 좀 더 강한 처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년 전부터 점심때 걷기 시작했다. 동료들 대부분 점심을 먹고 와 사무실에서 쪽잠을 잤다. 처음엔 동참했다가 이렇게 하다간 하루 종일 햇볕도 못 보고 지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간단히 계란이나 감자를 싸와서 먹고 신발을 갈아 신고 무작정 걸었다. 걸으니 좋은 점은 수북이 쌓인 일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걸을수록 점점 중독되었다. 일 년 간 걷고 나서 눈에 띄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야근이 거뜬하다.

기적처럼 고지혈증 수치가 낮아진 것 외에도 여러 긍정적 신호가 있다. 우선 피로가 줄었다. 주중 네 번은 야근을 한다. 전에는 밥 먹듯 야근을 해도 거뜬했는데, 마흔이 넘어가니 야근독이 풀릴 줄 몰랐다. 특히 연달아 야근하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런데 걷고 난 후 피곤을 잊었다. 일 년간 그 흔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고, 계절 바뀌듯 찾아온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몸이 활기차니 그 에너지로 일과 가정뿐 아니라 취미 활동도 가능해졌다. 전에는 주말이면 소파와 한 몸 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책도 보고 글도 쓴다.


2. 돈을 벌었다.

차를 타고 출근하면 30분이면 갈 거리를 대중교통은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더구나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패턴이라 차의 유혹에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루 만보를 걷기 위해서는 점심때 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소 2,000 천보를 확보할 수 있기에 과감히 걸어서 출퇴근을 선택했다. 기름값을 건졌다. 한 달이면 그 금액은 무시 못했다. 아침 출근 시간에 매일 글을 썼고, 퇴근길에는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일 년간 365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돈도 벌고 글 쓸 시간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렸다.


3. 감성이 풍부해졌다.

종일 사무실에 있다 보면 계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걷다 보니 주변 풍경이 계절을 품고 변화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와. 봄에 씨앗은 이렇게 싸트는 구나. 여름은 뜨겁지만, 나무 그늘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가을에 오색빛깔 단풍은 마음까지 다채롭게 만드네. 유독 눈이 많이 온 겨울엔 뽀드득 거리는 발소리가 참 예쁘다. 자연을 몸에 담으니 죽은 갬성이 살아났다. 이래서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 되나 보다. 계절 따라 걷는 맛도 제각각이었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감성이 말랑거리니 덩달아 젊어진 느낌이다.


4. 인싸가 되다.

처음엔 혼자 걸었다. 주변 동료는 꿀 맛 같은 휴식을 포기 못했다. 더구나 점심을 안 먹으면 큰일 날줄 알았다. 호기심에  따라온 사람들이 생겼다. 안 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만 먹은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걷기에 빠져들었다. 각자의 기호에 따라 산길을 가는 팀, 평지를 걷는 팀이 생겼다. 점심이 다가오면 메신저에 불이 난다. 골라 먹 듯 그 날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하면 된다. 서로 걷는 길에 데려가려 했다. 며칠 전에는 만성 허리 통증에 시달리던 동료가 걷기에 합류했다. 한 시간 꼬박 걷고 나서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굳은 의지를 갖고 계속 걷겠다고 다짐했다. 어느새 걷기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걸으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온다. 속 깊은 대화가 오가다 보면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늘다 보니 고된 회사생활도 이겨낼 힘을 얻었다.




걷기가 좋은 이유는 이 보다도 수없이 많다. 걷기만 했을 뿐인데 삶이 풍성해졌다. 주말에 집에 있을 때도 걷고 싶은 충동이 수시로 찾아온다. 그럴 땐 가족들을 꼬셔서 함께 걷는다. 일부러 목적지를 정하고 가다 보면 버스 몇 정거장도 금방이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가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가족 간의 정은 덤으로 따라왔다.


이제 걷기는 삶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어떤 일이 있더라고 하루 만보 걷기는 계속 실천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걷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있다. 글을 마치면 간단한 운동복에 모자를 쓰고, 생수 한 병을 든 채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야겠다.


문득 찾아온 생각. 걷기와 글쓰기는 많이 닮았구나. 하면 할수록 행복하고 평생 하고픈.


내일 출근하면 어디로 걸을까. 둘레길?, 공원 길? 행복한 고민 중이다.


벚꽃이 예쁘게 핀 봄의 둘레길
울창한 숲이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막아준 회사 산책로
가을 단풍이 그림같은 공원 길
눈을 맞아 온통 하얀 빛깔의 겨울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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