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람 냄새

봄 산은 죽은 다리도 걷게 만든다.

걷길 잘했네.

by 실배

갑자기 길동무에게 연락이 왔다. 점심 약속이 생겼단다. 운동화의 끈을 조이던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더구나 미세먼지는 나쁨을 넘어 최악이었다. '그냥 하루 쉴까. 어제 잠도 못 자 피곤하잖아. 사무실에서 자자.' 머릿속에서는 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계속 날아왔다.

신기한 일일세. 머리와 다리가 따로 놀았다. 머리는 계속 말리는데, 다리는 이미 계단 1층에 다다랐다. 그래, 가자. 평소 가던 코스 중 산을 선택했다. 공기가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았다.

하늘은 뿌연 회색빛이었다. 목도 컬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나'에게 집중했다. 걷는 순간만큼은 하늘을 나는 듯 자유롭다.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기한이 다가오는 대출금, 불안한 미래도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 속에 날려 버린다.

날이 더웠다. 산 입구에 다다랐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찼다. 미세먼지 때문일까. 등산객이 평소보다 적었다. 사람도 없고 좋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의 옷으로 이제 막 갈아입는 모습은 무언가 나와 닮았다. 지나간 계절과 다가오는 계절 사이에는 늘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가 되면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된다. 내 눈에 비친 산의 모습이 그랬다. 아직 겨울을 완전히 보내지 못 한 체 봄을 맞이했다.

그래도 돌 틈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은 자고 있던 숲과 나무를 깨웠다. 군데군데 앙상한 가지에도 봄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초록이 우거진 봄의 산을 볼 수 있으리라.

이제 다 왔다는 신호가 보였다. 붉은 다리였다. 은은한 벚꽃이 수놓고, 알록달록한 단풍이 가득 드리운 그 길은 아직 휑했다.

다리를 지나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에 손수건을 두고 온 것이 아쉬웠다. 내 불편을 들은 것일까. 문틈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대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땀이 모두 식었다. 이제는 가야 할 때였다. '안녕' 인사를 건네고 발길을 돌렸다.

혼자라도 좋았다. 결단해 준 다리에 칭찬이라도 해주어야겠다. 잘했어. 고마워. 덕분이야.

사무실로 향하며 하루의 중요한 일을 해낸 뿌듯함이 찾아왔다. 오늘처럼 고민할 순 있어도 굳건히 걸어야겠다. 걸으며 받은 선물 같은 순간이 떠올랐다.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그래. 걷자. 흔들림 없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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