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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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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17. 2021

봄 산은 죽은 다리도 걷게 만든다.

걷길 잘했네.

갑자기 길동무에게 연락이 왔다. 점심 약속이 생겼단다. 운동화의 끈을 조이던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더구나 미세먼지는 나쁨을 넘어 최악이었다. '그냥 하루 쉴까. 어제 잠도 못 자 피곤하잖아. 사무실에서 자자.' 머릿속에서는 가지 말라는 메시지가 계속 날아왔다.

신기한 일일세. 머리와 다리가 따로 놀았다. 머리는 계속 말리는데, 다리는 이미 계단 1층에 다다랐다. 그래, 가자. 평소 가던 코스 중 산을 선택했다. 공기가 조금이라도 나을 것 같았다.

하늘은 뿌연 회색빛이었다. 목도 컬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나'에게 집중했다. 걷는 순간만큼은 하늘을 나는 듯 자유롭다.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기한이 다가오는 대출금, 불안한 미래도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 속에 날려 버린다.

날이 더웠다. 산 입구에 다다랐는데 벌써 이마에 땀이 찼다. 미세먼지 때문일까. 등산객이 평소보다 적었다. 사람도 없고 좋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의 옷으로 이제 막 갈아입는 모습은 무언가 나와 닮았다. 지나간 계절과 다가오는 계절 사이에는 늘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때가 되면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된다. 내 눈에 비친 산의 모습이 그랬다. 아직 겨울을 완전히 보내지 못 한 체 봄을 맞이했다.

그래도 돌 틈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은 자고 있던 숲과 나무를 깨웠다. 군데군데 앙상한 가지에도 봄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초록이 우거진 봄의 산을 볼 수 있으리라.

이제 다 왔다는 신호가 보였다. 붉은 다리였다. 은은한 벚꽃이 수놓고, 알록달록한 단풍이 가득 드리운 그 길은 아직 휑했다.

다리를 지나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에 손수건을 두고 온 것이 아쉬웠다. 내 불편을 들은 것일까. 문틈 사이로 봄바람이 살랑대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땀이 모두 식었다. 이제는 가야 할 때였다. '안녕' 인사를 건네고 발길을 돌렸다.

혼자라도 좋았다. 결단해 준 다리에 칭찬이라도 해주어야겠다. 잘했어. 고마워. 덕분이야.

사무실로 향하며 하루의 중요한 일을 해낸 뿌듯함이 찾아왔다. 오늘처럼 고민할 순 있어도 굳건히 걸어야겠다. 걸으며 받은 선물 같은 순간이 떠올랐다. 삶을 충만하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

그래. 걷자. 흔들림 없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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