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감긴 눈을 보았다. 아직 새벽의 잠은 딸의 얼굴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다가가 폭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어깨 사이로 전해는 조막만 한 손떨림, 따스한 살내음은 행복 속으로 한없이 밀어 넣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아빠, 안녕." 하며 방으로 사라졌다. 어리마리 홀로 테이블에 앉아 딸이 두고 간 온기에 기대었다. 아빠 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건만, 그 말에 지금도 깜작 놀랄 때가 있다니. 내가 뭐라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데. 아이에게 비추인 한울이 초라해 오그라든다.
한때 결혼은 저 멀리 행성만큼 멀게 느꼈었다. 종종 어두운 골목 속을 헤맸던 20대는 세상의 밝은 것들과 거리를 만들었다. 우연일까. 운명일까. 나와 다른 빛의 그녀를 만났다. 그 안에선 무언가 된 듯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결혼의 방점을 찍고 아내가 되었다. 신혼의 사탕처럼 달콤한 꿈은 이내 아빠가 될 수 있다는 부담이 되었다. 아직 준비가 안되었어. 아니 영원히 그럴 수도.
세상은 늘 예측불가 투성이다. 반년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처음 맛 본 기분이었다. 온갖 삼라만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할 수 있어, 아니야. 기대돼, 두려워. 괜찮아, 어떡하지. 처음 두 손으로 아이를 받아 들고, 바보처럼 엉엉 울었다. 이미 마음 안에는 그 무엇보다 단단히 박혀있었다. 괜한 걱정을 했어. 지나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여린 가슴은 창에도 뚫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갑옷으로 바뀌었다. 약속해. 널 위해 강해질게. 지켜봐 주렴
아이는 거친 해안가에도 잘 자라는 통보리사초처럼 쑥쑥 컸다. 나도 반에 반에 반 정도는 성장했어야 텐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리라 다짐했건만. 여전히 내 마음의 크기는 더디게 자랐다. 우당탕탕. 사춘기의 터널에 진입한 아들과는 속 좁은 싸움의 연속이다. 뒤돌아 부끄러워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자꾸만 떠나려는 딸의 뒷 발치에 서서 닿지 않는 손짓만 허우적거린다.
'있잖아, 고백할 게. 타고난 가슴이 조막만 해 전부 품을 순 없어. 수없이 노력해도 안 되는 걸. 그런데 말이야. 비좁아도 삽으로 파고, 곡괭이로 찍어서라도 너희들이 숨 쉴 공간은 꼭 만들어 놓을게. 오래도록 머물다 언젠가 떠나더라도, 다시 돌아올 그날을 기약하며 그 방은 비워둘게. 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기억만 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