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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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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Apr 12. 2021

말했어야 했는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띠리링’      


유난히 고요했던 주말 아침, 적막을 깨는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민수냐. 엄마다. 지금 통화 괜찮니?”

.”

할머니 산소를 가려고 하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네....”     


어머니의 말 줄임표에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말이 담겨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가겠다고 답한 후 연락을 끊었다. 이제는 편하게 말해도 되건만, 어머니는 아직도 금기어처럼 내뱉지 않는다. 하긴 누굴 탓할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때의 실수가 아스라이 떠올랐다.   

  

아내와 2년째 사귀면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굳어졌다.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 있었다. 바로 종교 문제였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어릴 때부터 불경을 외우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엄격했다. 아직도 자동 반사처럼 그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절에 나갈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종교는 불교였다. 그에 반해 아내의 종교는 기독교였다. 어머니가 결혼 조건으로 다 되어도 그것만은 안된다고 했던.      


심지어 장모님은 목사님이었다. 아내가 초등학교 때쯤 암에 걸리셨다. 병원에서 모두 안 된다고 포기할 때 교회에 나가셨다. 기도가 응했는지 기적적으로 치유되셨고, 그때부터 열정적으로 교회에 나갔다. 뒤늦게 신학 대학교 및 대학원에 진학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당시에는 어느 작은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 중이었다.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간 날 들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다른 건 괜찮은데, 종교가 걸리네.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할 수 없어.”     


결혼이 다급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 했다. 바다를 두 발로 걸으라고 해도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장모님은 석연찮은 듯 바라보았지만, 확신에 찬 내 눈빛을 보고는 마지못해 허락하였다. 잠시 밖에 나와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였다. 아내는 제사에는 참석해도 절을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마음 한구석에 돌덩이가 들어온 듯 무거웠다. 어머니께 어떻게 말씀드리지.      


미리 말했어야 했다. 그냥 잘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벌쩡했다. 상견례 날 어머니께서 집안의 종교는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말에 산적이 목에 ‘턱’하고 걸렸지만,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차선책으로 주례 없는 결혼식을 선택했다. 하객으로 온 목사님과 스님이 나란히 앉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꿈같은 신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후 석 달 뒤 첫제사가 돌아왔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속으로만 낑낑댔다. 고민 끝에 좀 더 유연한 아버지를 만나 보기로 했다. 예상과 달리 아버지도 단호했다. 결국 소문은 흘러 흘러 어머니 귀에까지 흘러갔다.      


제사가 있기 며칠 전 저녁, 집으로 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나란히 앉은 모습은 어느 통속극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시베리아보다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어머니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목소리로 절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못 하겠다고 버텼다. 큰 소리가 오갔다. 어머니는 우리를 노려보며 그러려면 호적을 파고 나가라고 했다. 하늘이 노랬다. 모두 내가 벌인 일이었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러겠다며 아내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제사에도 가지 않았고, 부모님과 연락이 단절되었다.      


결혼 전에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고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아내의 원망과 어머니의 분노가 한데 어우러져 나를 짓눌렀다. 한강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몇 달 뒤 아내는 임신을 했다. 오래간만에 전화를 드려 그 소식을 전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어머니의 목소리에 금세 봄이 찾아왔다. 복덩이 덕분에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고,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그 뒤부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교회를 다니는 것을 인정해주셨다. 아내도 어머니가 괜찮다고 했음에도 제사 때 간간이 절을 했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 한순간에 스르륵 풀렸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후회된다. 어머니와 아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랬다는 합리화를 해보지만 옹색하다. 미리 말했다면 진통은 있었겠지만, 나중엔 인정받았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 않은가. 오히려 순간 위기를 모면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더 큰 화를 불러일으켰다.    


언제쯤 말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까. 쉽지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론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불편한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은 두고두고 인생의 흑역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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