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칠한 키에 귀공자 같은 하얀 피부, 더구나 중저음의 귀에 쏙 들어오는 꿀 보이스까지. 그 당시 여자 친구(현재 아내)는 나만 바라보다가도 그가 나타나면 금세 눈이 돌아갔다. 혹여나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듯 기쁨을 주체 못 했다. 옆에서 질투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하긴 표현한 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는 인간계의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계의 존재, 바로 현빈이었다.
아내의 현빈 사랑은 결혼하고 나서도 변함없었다. 그 절정은 3년이 지난 뒤에 방영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었다. 그 시간은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본방 사수였다. 아내는 수시로 여주인공 길라임으로 빙의했다. 저러다 작두 타는 것 아닌가 두려웠다. 창피한 것은 절대 못하는 사람이 나와 그 유명한 윗몸일으키기 장면까지 연출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감정의 기복은 폭포수 같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내의 현빈 사랑은 옅어진 듯 보였다. 더구나 집에 TV를 없앤 뒤로는 새로 드라마를 찍어도 보지 않았다. '그래. 세월 이기는 장사가 있겠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음을 최근에 깨달았다.
어느 날 불쑥 딸이 현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아내가 수시로 사진도 보여주고, 좋아한다고 했단다. 시크릿 가든 줄거리도 이야기해주어 결말까지 알고 있었다. 둘째에게서 익숙한 눈빛을 보았다. 이젠 아내를 넘어 딸까지. 이런 마성의 매력덩어리 같으니라고.
이번 주 금요일은 내가 딸을 데리고 병원 검진을 가야 했다. 회사에 조퇴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영어 학원이 끝났음에도 오지 않아서 밖에 나가 보았다.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화장실이 급하다고 사라졌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둘이서 차를 타고 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반려견에 부쩍 관심이 많은 딸은 최근에 보았던 강아지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내가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키우련만. 둘 다 속만 탔다.
담당 선생님을 만나 진료를 받은 후 피검사를 해야 했다. 30분 정도 대기 시간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딸이 말을 꺼냈다.
"아빠. 엄마가 현빈 좋아하는 것 알지."
"그럼. 알지."
"혹시 엄마가 현빈이랑 결혼한다면 어떨 것 같아?"
"음.... 무척 화나고 슬프겠지...."
"근데 말이야. 만약 현빈이 착하다면 나는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귓가에는 노래 한 소절이 흘렀다.
제발 꿈이었으면. 그냥 너의 장난이었으면 좋아.
하지만 현실이었다. 나는 치졸하게 그리 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억측을 쏟아냈다. 딸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에이. 농담이야."라며 나를 들었다 놓았다.
그런데 만약 성격까지 좋다면 어떡하지. 그럴 일 절대 없겠지만, 간다면 보내주어야 하나. 딸이 현빈에게 아빠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 듯 아팠다.
'딸, 진정 농담이지. 혹여나 100만 분의 1이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아빠는 무척 슬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