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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긴 대화를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

정녕 나에게도 해주면 안 되겠니?

by 실배

사내에서 구성애 선생님의 자녀 성교육 강의가 있었다. 작년에 들은 동료가 추천해 주길래 신청했다.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여 조기에 마감되었다. 잠시 키보드에 손을 떼고, 강의실로 향했다. 사전에 질문 거리를 작성하고 제출한 후 곧바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소개하며 성에 대해 물리적 접근이 아닌 관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리곤 이론과 실제가 결합된 정말 도움되는 내용이었다. 무려 강의 시간도 30분을 넘겨가며 열정을 불태웠다. 추천해준 책과 영화도 열심히 핸드폰에 저장했다. 강의를 듣고 나니 이제부터 아이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강의 중에 깊이 반성했던 것이 사춘기 아이에게 추상적으로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화를 유도한다며 "오늘 학교에서 어땠어?", "친구들 관계는 어때?"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수백, 수십 가지를 떠올려서 답해야 되기 때문에 "몰라"라고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점심 급식으로 반찬이 무엇이 나왔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야 "소시지, 김치, 돈가스"라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아들을 "몰라"로 만들었던 거야. 배운 것은 바로 써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적용해보기로 했다. 마침 석가탄신일을 맞아 아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다. 좋은 기회였다.


전날 저녁 퇴근 후 집에 오니 아내가 말할 것이 있다고 했다. 아들이 친구에게 영화 본다고 했더니 같이 보고 싶다고 했단다. 아들에게 같이 보고 싶냐고 했더니 썩은 쭉쟁이 같은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했다. 자리로 둘이 보라고 양보했다. 드디어 당일, 중간에 아들 친구를 만났다. 친구를 보더니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밝음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곤 어찌나 조잘조잘 이야기를 잘하는지 '신몰라'로 불리던 내 아들이 맞나 싶었다. 귀를 한껏 열어 둘이 하는 대화에 집중했다. 친구가 먼저 아들에게 물었다.


"요즘 학교 생활 별일 없냐?"


앗. 이것은 구성애 선생님이 하지 말라던 추상적인 질문이잖아. 단답형으로 답할 것이 뻔하지.


"아. 며칠 전에 카톡방에서 우리 반 회장과 부회장이 대판 싸워서 회장이 방을 나간 것 있지. 얼마나 황당했던지. 이유도 별 것 없었어. 애들 숙제 전달하는 것으로 서로 의견이 안 맞았나 봐. 그래도 나중에 학교에서 만나서 화해했어. 너네 반은 괜찮아?"


이런 구체적은 대답은 무엇이지. 그간 수백 번 물어도 얻을 수 없는 장문이었다. 이건 뭐, 찌르면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 뒤도 둘의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더구나 아들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중간중간 "아. 그랬구나"라는 추임새를 넣으며 친구의 말에 경청했다. 전형적인 공감 반응이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녀석이었구나. 한편 다행이면서도 살짝 섭섭하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란히 앉아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짜식 그리 좋나. 영화를 보고 나서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도 아들은 순한 양이 되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도가 되었다. 집에서 늘 무뚝뚝해서 나가서도 저러면 어쩌나 했는데, 이렇게 밝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그간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집에 친구를 데려와서는 신나게 게임을 하다가 농구를 하러 나갔다.


비록 실전에 써먹을 질문을 하지 못했지만, 아들의 색다른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족했다. 생각보다는 훨씬 잘 지내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나는 천천히 시도하면 되지라고 생각할 때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시원한 물 한잔 주며 물었다.


"아들, 오늘 본 영화 중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뭐였어?"

".... 몰라. 생각 안 나는데."

"뭐라고. 오늘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줬더니 몰라가 뭐야!"

"알았어.... 그래.... 그거 있잖아. 차가 하늘 날았던 거. 됐지."


이룬. 역시 이론과 실전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차라리 안물 안굼 해야 오래라도 살지. 아까의 굳은 다짐은 눈 녹 듯 사라졌다. 밖에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았으니 굳이 집에서까지 잘하라고 할 필요 있겠어. 이 시기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는 구성애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아이스크림을 우적우적 먹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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