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조금 이른 출근을 했다. 잠시 할 일을 마무리하고 근무 상황 시스템을 켰다. 근무 상황에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외출을 입력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사유란을 남겨두고 한 참을 쳐다보았다. '아내와의 데이트'라 적으려다가 이후에 일어날 파장을 감당하기엔 나는 소심한 중년 아재였다. 결국 '차량 정비 등'으로 갈음했다.
업무 메신저로 길벗의 점심 산책 제안이 왔지만 급한 일이 있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사실이었다. 드디어 점심이 되었다. 서둘러 회사 정문 앞으로 나갔다. 조금 후에 아내가 차를 타고 도착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백운호수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얼마 전 아내 생일을 앞두고 데이트를 청했다. 월요일은 평일 중 아내가 유일하게 쉬는 날이었다. 사실 몇 번 까였다. 그 하루는 아내에게 무척 소중했다. 주로 지인과의 약속이 있었다. 살짝 서운하기는 했지만 대기표를 받았고 드디어 생일 전 날 성사되었다.
우리가 간 곳은 '뜰 안 채 2'라는 곳이었는데, 예전에 한 번 가보았는데 음식도 정갈하고 분위기도 좋았다. 예약을 한 덕분에 대기 없이 구석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나오기 전 맞은편 아내를 바라보니 살짝 머쓱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둘 만 시간을 낸 것이 얼마 만일까. 나 역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음식이 하나 둘 나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아내 말에 무조건 경청하기로 다짐했다. 내 말은 최대한 줄이고. 아내는 지난주 상담한 입양 가정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가 무언가 해 줄 수 없지만 열심히 고개도 끄덕이고 가끔 내 의견도 밝혔다. 이어지는 아이들에 관한 고민들. 이제 우리 이야기는 없는 것일까 웃펐지만 이 또한 우리가 만든 소중한 삶이었다.
후식까지 맛있게 먹고 내가 계산하는 동안 아내가 사라졌다. 밖으로 나가보니 정원에서 사진을 찌고 있었다. 당신, 이제 꽃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구료. 둘이 백만 년 만에 셀카도 찍었다. 에고 남사스럽게.
그리곤 백운호수가 근처의 뷰가 좋은 카페로 갔다. 여러 후보지 중 평이 가장 좋았다. 오후임에도 카페는 사람들로 바글댔고, 마침 호수 정면에 빈자리가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얼른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탁 트인 호수 뷰를 바라보니 막힌 속이 뻥 뚫렸다.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가. 서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한 결 부드러운 분위기에 이제는 우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거 연애 때의 추억, 아직 꾸고 있는 꿈, 노후에 둘이 보낼 계획 등 이야기는 뭉게구름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슬쩍 아내 손을 잡았다. 툭하고 몇 번 뿌리치더니 이내 가만있었다. 그 순간은 말없이 풍경만 바라보았다.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아내가 걷고 싶다고 해서 백운 호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호수 길을 걸었다. 걷기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호수를 바라보며 그윽한 풍경에 취했다.
아쉬운 시간은 화살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내는 회사 근처에 나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차 장 사이로 애틋한 연인처럼 손을 흔들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딸과 함께 마지막 할 일을 시작했다. 아내를 위해 미역국 끓이기였다. 딸은 엄마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고기가 없는 관계로 참치 미역국으로 정했다. 미역을 불리고 정성스레 음식을 완성했다. 딸은 엄마에게 축하 카톡도 남겼다. 마음 예쁜 우리 딸.
마무리로 식탁을 정리하고 늦은 잠에 들었다. 가끔 이렇게 데이트를 하면 좋으련만 시간을 내줄지 의문이다. 일단 대기표부터 받는 것으로.
"여보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늘 우리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주어 고맙고, 나도 잘할게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