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면 아내와 나는 아침부터 옥신각신한다. 대부분 내가 우겨서 운전대를 잡는다. 아내는 그때부터 옆에 앉아 두 눈을 부릅뜨고 내가 운전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한다. 혹여나 다른 길로 잘못 가진 않을까, 피곤해서 졸지는 않을까 수시로 점검한다. 한숨 푹 자면 좋으련만 잠시라도 눈을 붙인 적이 없다.
제발 좀 자라고 해도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단다. 아내의 이런 모습에 오히려 긴장되어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실수도 연발한다. 그러면 여지없이 잔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름을 느낀다. 하지만 마음속에 '참을 인'을 읊조리며 분노를 이겨 낸다. 중간에 휴게소라도 들르면 어느새 아내는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운전 잘 하는 아내
▲ 차로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면 아내와 나는 아침부터 옥신각신한다. ⓒ envato elements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마음이 편했다. 나는 타고난 길치로 내비게이션이 없었다면 아마 운전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비게이션을 보고 가도 애매한 상황은 찾아왔다. 특히 회전 교차로에 진입하면 직진을 해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왼쪽으로 가야 할지 늘 헷갈렸다. 몇 번이고 같은 길을 뱅뱅 돈 적도 있었다. 남성은 여성보다 공간 지각력이 좋다는데 나는 아닌 것 같았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길도 잘 찾고, 운전도 잘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명절 때 지방에 가거나, 가족 여행을 갈 때면 독박 운전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되어 침대에 뻗어 코를 드르릉 골며 주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도로도 잘 정비되지 않았던 시절, 구불구불한 길에 7~8시간 운전은 기본이었다. 그 당시 얼마나 힘드셨을지 나도 운전을 하게 되면서 깨달았다.
반면 어머니는 차에 타자마자 마법이라도 걸린 듯 고개를 양쪽으로 마구 저으며 금세 잠이 드셨다. 어쩔 땐 뒤에서 볼 때 목이라도 꺾이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러고 있다.
아내가 운전할 때면 조수석에 앉은 나는 어머니처럼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했다. 예전에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뿅" 하고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이동했던 것이 흥미로웠는데, 나도 아내가 운전할 때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언젠가 차 안에서 자는 것이 일종의 멀미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은근슬쩍 나도 그런 거라며 숟가락을 얹는다. 처음엔 아내에게 말도 걸며 졸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내는 오히려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운전에 도움 된다며 차라리 자라고 했다. 절대 아내가 졸음운전 할 일이 없을 것을 잘 알기에 조용히 입 다물고 꿈나라로 향했다.
운전하다 아찔했던 순간
사실 몇 년 전에 운전하다가 식겁한 적이 있었다. 여행지에서 흥에 취해 혼자 술을 많이 마셨다. 다음 날 충분히 쉬고 출발했으면서도 그날따라 쏟아지는 잠은 내내 나를 위협했다. 틈틈이 물도 마시고, 껌도 씹고, 아내에게 말도 걸며 잠을 깨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래도 안 되면 무쇠 같은 손으로 양 뺨을 마구 때렸다. 그런데도 눈에 무거운 추라도 단듯 자꾸 감겼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속도로를 가다가 캄캄한 굴에 진입한 순간 무의식 저편에서 "여보!" 하는 강렬한 고함이 들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핸들을 놓고 있었다. 맙소사. 급히 핸들을 잡으니 차가 좌우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죽기 살기로 붙잡고 좀 더 간 후에야 간신히 잠잠해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식은땀이 양미간 사이로 흘렀다. 잠이 번쩍 깼다. 아내는 "정신이 있는 거냐"며 다그쳤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때 옆에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연신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가까운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운전대를 빼앗겼다. 그 뒤로도 한동안 아내는 내가 운전할 때면 "오빠 괜찮아?", "졸린 것은 아니지?"라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차를 가져가는 가족 여행 때 돌아오는 전날에는 과음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운전하며 삶을 배운다
▲ 부부 관계와 닮은 운전 운전도 부부 관계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안전하게 종착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다. ⓒ @Unsplash
얼마 전 아내와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면 중간쯤에서 교대를 하기로 합의했다. 여전히 끝까지 하겠다고 서로 우길 때도 있지만, 휴게소에 들르면 자연스레 운전대를 넘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나눠서 운전하는 것이 장거리 운전으로 인한 피로도 막고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모르겠다. 그간 은연중에 운전은 내가 해야 한다며 자존심을 세웠던 것 같다. 그게 뭐라고.
최근에 운전 관련해서 마음에 와닿는 명언을 보았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멍청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미친놈이다." - 조지 칼린
이 글을 읽고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늘 내가 최고란 착각을 은연중에 갖고 산다. 운전에 관해서도 이런 자신감을 뽐내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하지만 운전은 절대 겸손해야 함을 경험으로 배웠다.
나 역시도 아내가 나보다 운전이 낫다는 점을 인정하고 괜한 자존심은 내려놓으련다. 그러고 보면 운전이 부부관계와도 참 많이 닮았다. 힘들 땐 나누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안전하게 종착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