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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un 06. 2022

만둣국이 떠오를 땐, 이모가 보고 싶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으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창밖으로 비가 우수수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더위를 잠시나마 식혔다. 그때 갑자기 만둣국이 생각났다. 그리곤 자연스레 3년 전 돌아가신 이모의 모습도 떠올랐다.  

   

어릴 때 어머니는 몸이 좋지 못했다. 갱년기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자주 누워계셨다. 그래서 근처에 혼자 살던 이모가 와서 살림을 도와주었고,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아예 같이 살게 되었다. 어른들의 지나가는 이야기로 젊은 적 이혼하셨다는 것만 알았다.    

 

이모는 유독 나를 예뻐하셨고, 그 사랑은 고스란히 음식에 담겼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거나 시험을 망치고 툴툴거리는 모습으로 집에 오면, 이모는 묻지도 않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내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별식 김치전이 노릇하게 익고 있었다.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며 접시에 한가득 담아 내 앞에 놓았다. 그러면 ‘후후’ 불며 입안에 넣으면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왔다. 기분은 이내 흐린 하늘에서 맑게 개었다.     


김치전 외에도 비지찌개, 육개장, 장조림, 갈비찜, 콩국수 등 이모 덕에 좋아하는 집밥이 하나, 둘 늘어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단연코 만둣국이었다. 그건 아마도 이모와의 추억이 가득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을이 겨울로 옷을 갈아입을 시기가 되면 이모는 꼭 만둣국을 만들어 먹자고 했다. 먼저 만두를 빚었다.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큼지막하게 두 장 깔고 만두피, 밀가루, 물을 준비했다. 이모는 스텐볼에 만두소를 담아 내 옆에 앉았다. 이때부터 가내수공업이 시작되었다. 손바닥 위에 만두피를 놓고 끝에 물을 묻힌다. 숟가락으로 만두소를 퍼서 그 위에 얹고 양 끝을 붙이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주름지게 겹쳐서 접는 것이었다.

조물조물 손으로 빛은 만두 출처 : Unsplash

    

간단해 보이면서 쉽지 않았다. 만두소를 너무 많이 넣어 속이 터지기 일쑤였고, 만두피가 잘 붙지 않아서 조개가 입을 열 듯 벌어졌다. 옆에서 보면 이모는 대충 하는 듯 보여도 모양도 일정하고 좀처럼 망치는 법이 없었다. 그에 비해 내가 만든 만두는 크기도 뚱뚱이, 홀쭉이 등 제각각이었다. 속상해서 입이 뾰족이 나온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옆에서 꼭 농담하곤 했다.     


“큰일 났네. 만두를 예쁘게 빚어야 나중에 예쁜 아이가 생긴다는데. 우리 실배 어쩌나.”   

  

그러면서 빙그레 반달눈을 지어 보이는 이모 얼굴이 이상하게 밉지 않았다. 손에도 그리고 뺨에도 밀가루를 잔뜩 묻힌 채 이런저런 이야기로 만두를 빚으면 시간은 금세 지났다.      


남은 만두가 몇 개 남지 않으면 나에게 맡겨 놓고 부엌에 가서 만둣국 만들 준비를 했다. 멸치와 무로 국물을 내고,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만두를 가져오라고 했다. 냄비 안에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다. 마무리로 이미 풀어놓은 달걀을 넣으면 다 되었다.     


동그란 그릇에 만둣국을 담으면 하얀 김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안에는 동그랗고 쭈글쭈글한 만두가 반갑게 고개를 내밀었다. 한 입 쏙 넣고 씹으면 보드라운 만두피와 잘 익은 만두소가 어우러져 어찌나 아삭하고 고소한 지. 국물까지 모두 비워내고 한 그릇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남은 만두는 봉지에 고이 담아 냉동고에 보관했다. 겨우내 우리 식구들의 소중한 비상식량이 되었다. 생각날 때면 언제는 꺼내서 뜨끈한 만둣국을 만들어 먹었다. 덕분에 우리는 별미를 즐기며 추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모는 근처 빌라로 이사했다. 결혼 후 신혼집과도 그리 멀지 않아서 틈틈이 찾아뵀다. 그러다 어느 날 빌라에 화재가 발생했고,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이모는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연세가 많이 드셔서 그런지 회복이 더뎠고,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요양 병원에 모셨다.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이모를 뵈러 갔다. 바싹 마른 몸이 어린아이처럼 작게 느껴졌다. 음식도 씹을 수 없어서 코에 줄을 이어 영양을 공급해야만 했다. 예전처럼 활짝 웃을 순 없어도 내가 찾아오면 온몸 가득 반가움을 표현했다. 어느 날인가. 이모의 손을 잡고 종일 누워있으면 답답하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괜찮아. 그냥 예전 생각을 많이 해. 너랑 즐거웠던 시간도. 입도 짧은 애가 내가 해준 음식은 어찌나 잘 먹던지. 그때 그게 참 예뻐 보였는데……. 요즘도 밥은 잘 챙겨 먹지?”     


그 순간에도 이모는 내 걱정뿐이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 뒤로 2년 정도 병원에 계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셨다. 한동안 길을 가다가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이모는 나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며 천천히 그 빈자리를 채워갔다.     


추억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생뚱맞게 만둣국이라니. 그것도 이제 곧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는데 말이다. 그래도 덕분에 이모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주중에 꼭 만둣국을 먹자고 해야겠다. 만두 만들 재료도 사면 어떨까. 조물조물 만두를 빚는 온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음식은 그런 것 같다. 단순히 먹는 행동 이상으로 그 안에 살아온 추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만둣국을 떠올리며 이모가 보고 싶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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