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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Sep 12. 2022

문경에 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시골의 아늑한 풍경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처가댁이 있는 문경에 왔다. 새벽에 내비게이션으로 확인한 시간은 2시간 반이었으나 실제 그보다 두배 가까이 걸렸다.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나무로 된 이정표를 확인했다. 좁고 경사가 높은 길을 내려가서야 붉은 황톳빛이 감도는 처마를 발견했다. 차를 주차하고 나오니 장인, 장모님이 함박웃음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옆에서 꼬리가 부서져라 흔들던 또순이도 이제는 제자리에서 뱅뱅 돌며 반가움을 주체 못 했다. 고작 몇 달에 한번 보는 것이 다였음에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이미 거실엔 상 한가득 음식이 놓여있었다. 먼 길 왔다며 얼른 먹으라는데 어디에 먼저 젓가락을 대야 할지 몰랐다. 허여 물건 하니 때깔 좋은 홍어를 짚으니,


"그거 사위 오면 같이 먹으라고 미리 주지 않았던 걸세."


장인어른의 투정 섞인 한마디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장거리 운전의 긴장이 풀리니 허기가 찾아왔다. 육, 해, 공을 넘나들며 배를 채웠다. 공깃밥을 싹싹 비우고, 한 그릇 더 먹었다.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모님의 시선을 느껴졌다. 애교 담당 딸이 조잘조잘 재밌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었다. 깊은 산속이라 평소 사람 볼 기회가 적은 두 분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듯 음식도 잊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설거지 담당인 내가 열심히 그릇을 달그락 거리던 중 아이들은 이미 또순이를 만나러 떠났다. 마치고 잠시 침대 위에 누웠는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빠. 아빠. 일어나 봐. 산보 가야지."


한쪽 눈만 겨우 뜨고 포대자루처럼 흔들어대는 딸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몹시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밖에 나가보니 장인어른이 또순이의 목줄을 외출용으로 바꾼 채 들고 계셨다. 인계받은 파란색 목줄을 들고 함께 길을 나섰다.


인적 없는 길. 자연이 내는 화음은 지친 귀를 달랬다. 풀이 바람에 닿아 푸석거리고, 저 너머에서 이름 모를 새가 지저 기고, 냇가에서는 세찬 물줄기가 커다란 소리를 만들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듣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고 달콤한 음악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나의 평온은 수풀 사이에 코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탐색하는 또순이의 부산함에 금세 깨졌다. 또순이의 넘치는 결기에 줄의 잡은 내손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이제 막 낮이 밤으로 그 색을 바꾸었다. 그 찰나의 순간, 심장이 몹시 뛰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생뚱맞지만 그랬다. 문경에 오면, 도시에서는 잊고 있던 철학적 명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내가 갖고 있던 현실의 고민들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이내 사라졌다. 나는 그저 걷고, 듣고, 바라보는 사람이다.


한 달쯤 이곳에서 생활하면 어떨까.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벗어나 그대로 살고 싶다. 현실이 될 수 없는 충동에 잠시 휘둘려보았다. 딸은 어느새 다가와 사진기에 담은 장면을 내밀었다. 그 안엔 내가 눈으로 담은 순간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래 지칠 땐 사진을 보면 되겠네. 잘 찍었다는 말에 볼이 발그레 기분 좋은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좋으면 표정 안에 숨길 수 없는 그 시기의 아이였다.


요즘 들어 부쩍 기력이 약해진 장인어른은 자꾸 뒤처졌다.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보조를 맞추었다.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가 마음을 콕콕 찔렀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움직이셨었는데. 산보를 가면 오히려 아버님의 잔 발걸음을 따라가기 어려웠는데.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애전 했다.  장인어른은 잠시 걸음을 멈추며,


"신서방이랑 지리산에 한번 더 가야 하는데...."


그 말이 촉발되어 10년 전 둘이 떠났던 3박 4일간의 지리산 종주를 떠올리며 추석을 되새김질했다. 정상에서 맛보았던 일몰의 감동은 여전히 내 안 한구석에 남아있다. 아직은 낯설었던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그 여행을 통해서 한 뼘 이상 좁힐 수 있었다. 나중에 꼭 다시 가자고 약속했었는데 어느새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서둘러 다녀왔어야 한다. 애써 밝은 척 꼭 그러자고 답을 했다.


어느새 집에 돌아왔다. 또순이의 목줄을 갈아 끼우고, 마당 앞 넓적 바위에 앉아 쉬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길이라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달아 있어 수월치 않았다. 딸은 또순이에게 간식을 주며 계속 장난을 걸었다.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낮의 평온한 바람이 밤의 차가운 산바람이 되었다. 얼추 땀이 식을 무렵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밖으로 구수한 음식 냄새가 퍼졌다.


들어가기 전, 잠시 검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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