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말야. 편지를 쓰기 전 참 많이도 망설였어. 그건 아마도 내가 많이 부끄럽기 때문일 거야.
너의 방문이 굳게 닫힐 때 왜 그런지 이유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운해만 했었어. 아니 그저 사춘기 탓으로 돌리고만 싶었는지 몰라.
아직 기억 속에 너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방 끝 저기서부터 한걸음에 달려와 푹 안기어 앙상한 양 볼에 뽀뽀를 해주며 “아빠 사랑해”를 외친 자그마한 꼬마 아가씨인데. 그러면 토실한 겨드랑이에 손을 쏙 넣고 네가 좋아한 달나라까지 저 멀리, 멀리 데려가 주었었지.
그때 네가 지었던 웃음 속을 뚫고 나온 기다란 반달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니. 아빠는 딸바보로 태어난다는 말 솔직히 믿진 않았는데 말이야. 주었던 사랑보다 늘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돌려받으며 이젠 알 것 같네. 그건 숙명이자 운명이란 걸.
며칠 전 아침에 출근해서 불쑥 핸드폰 속 어떤 사진을 찾다가 무얼 잘 못 눌렀는지 너와 함께했던 추억이 파노라마로 펼쳐진 것 있지.
기억나니. 요만할 때 어린이집 봄 소풍으로 떠났던 안산 갯벌 체험에서 오줌 마렵다고 잔뜩 찡그린 얼굴, 여름 때 안양천에서 물놀이장에서 둘이서 신나게 놀다 흠뻑 젖어 미역처럼 달라붙은 앞머리를 하며 환하게 웃던 순간, 둘이 손을 꼭 잡고 알록달록 가을 단풍을 배경으로 만들었던 때, 끝도 없이 내리던 눈 속에서 아빠 눈사람, 아이 눈사람을 만들어 그사이에 둘이 꼭 안고 있는 모습. 그 하나하나.
모르겠어. 온통 웃는 사진들 뿐인데 그 순간 아빠는 울컥해서 눈물이 난 거 있지. 바보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저 사진 속에서만 남은 슬픔 때문이었을까. 갱년기란 단어를 들어 보았니. 나이가 들면 생기는 호르몬 작용이라는데 할 없이 눈물만 는다.
그랬던 너였는데. 이 집에 이사 오고 너의 방이 생기고 또 한해, 두 해 자라며 키도 이만큼이나 커졌지. 핸드폰이 생기고, 좋아하는 걸그룹이 있고, 나는 알 수 없는 너만의 비밀이 생겨나더라.
몹시 궁금하면서도 모른 척했어. 이따금 네 방 너머로 들려오는 조잘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대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 사이에 거리가 생긴 걸까. 네가 한 발자국 뒤로 빼면, 나는 한 두 걸음 더 뒤로 갔던 것 같아.
어느 순간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도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만으로 너의 존재를 인식할 수밖에 없음은 아빠란 존재가 이젠 커다랗지 않음을 인정하는 듯싶어 마음 안에 뻥 뚫린 동그란 구멍을 만들었어.
한 달 전 우리 둘 사이에는 커다란 폭발이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었어. 사소한 말 한마디에 발끈해서 큰소리가 오갔지. 그리곤 긴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아빠가 화해 요청했을 때 너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안방으로 데려갔어.
무슨 말을 하려나 심장이 어찌나 콩닥거리던지. 그때보다 떨렸던 순간은 떠오르지 않더라. 그때 내 온 신경은 온통 너의 자그마한 입술로 향했어. 서로에게 서운한 점, 바라는 점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그보다 아빠란 존재가 먼지보다 작게 느껴진 적이 없었네.
오빠랑 차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그리고 굵은 눈물방울이 하얀 뺨을 타고 흐를 때 어찌할 바를 몰랐어. 정신을 차리고 떠올려보니 정말 그랬더라. 집에 와서도 늘 오빠를 먼저 찾았고, 같이 있어도 내 시선은 오빠에게로 향했어. 둘만 좋아하고, 둘만 아는 스포츠 이야기로 널 소외시켰어.
아빠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너는 계속 신호를 보냈던 거야. 이제 밥 먹으면서도 너를 바라보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뉴진스 노래를 공부하며 말을 꺼내고, 퇴근하면 제일 먼저 너의 방 앞에서 이름을 부르지. 그러면 예전처럼 반달눈을 활짝 뜨며 아빠에게로 달려오더라.
얼마 전 교회 야유회에서는 종일 아빠 옆에 꼭 붙어 손을 잡고 다니며 조잘거려서 주변의 시샘을 받았잖아.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나 할 말이 많을 줄 몰랐어. 너의 베프는 지우, 서진이고 뉴진스 멤버가 다섯 명이고 그 중 해린이 팬이라는 것도 지금은 손톱 꾸미기를 흠뻑 빠져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 오는 길엔 인생 내 컷도 찍었잖아. 머리띠까지 하고 말이야. 주책인 줄 알면서도 그날 얼마나 좋았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아빠는 회사 책상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그 사진을 놓아두었단다. 하루를 시작할 때 환하게 웃는 너의 얼굴을 보면서 힘을 얻곤 해. 매일 보아도, 또 보아도 새롭고 좋은 걸 어떡하니.
그런데 말이야. 이제 곧 사춘기가 들이닥치고, 또다시 너의 방문이 다시 굳게 닫힐지라도 이제는 믿음이 있어. 너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빠의 방이 있다는 것을. 아빠 역시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최대한 그 시간을 미루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네.
수천 아니 수만의 인연 속에서 운명처럼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딸. 늘 부족한 아빠지만 너에 대한 마음은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단다.
사랑해. 세상이 만들어 놓은 두 단어로는 모두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이.
- 가을이 다가와 괜스레 센티 해지는 어느 날 아빠가 -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매일글쓰기 모임에서 발행한 뉴스레터 글을 공유합니다.
늘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던 딸이 어느 순간 방문을 잠그고, 저를 멀리하는 모습에 처음엔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그렇게 한 이유를 나중에 깨닫고 어찌나 미안하던지요. 제 자신이 부족한 아빠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편지는 딸에게 부치지는 못하지만, 제 마음만큼은 아이에게 닫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