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조급했다. 처음 가보는 길, 혹여나 헤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도서관에서 지리산 관련 책도 빌려 읽고, 블로그 포스팅도 부지런히 챙겨 보았다. 자꾸 보니 대충 어떻게 가야 하는지 감이 왔다. 혹여나 모르면 네이버 지도가 있으니 덜 걱정해도 좋으련만.
여행은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다. 토, 일 전체 일정으로 잡았던 계획은 아들이 일요일 저녁에 학원을 가게 되는 바람에 조정이 불가피했다. 원래는 토요일에 둘레길 1코스, 일요일에는 2코스를 종주하려 했다. 결국 일요일 일정은 오전에 인근 산책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시간대별로 타임 테이블을 짜보았다. 이렇게 해야 여행지에서의 변수를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으리라. 한글 문서로 작성한 후 최종 아들에게 결재를 맡았다. "괜찮은데."란 한마디가 부서장 칭찬 보다도 왜 그리 좋은지.
금요일엔 1시간 조퇴까지 해서 일찍 나와 마트로 향했다. 걷는 중 필요한 간식을 사기 위해서였다. 초콜릿, 사탕, 과일 등을 당을 보충할 소중한 자원이었다. 집에 와서 내 것 반, 아들 것 반으로 나누었다. 배낭을 꺼내 옷가지와 필요 물품 등을 채워 넣었다. 오가는 버스에서 읽을 책은 필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저녁 일찍 침대에 누웠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 소풍 가는 아이처럼 내내 설렜다. 새벽 1시, 3시, 5시 등등 2시간마다 깨다가 결국 새벽 7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나 빠진 짐은 없는지 챙기다가 아들을 깨웠다. 맙소사. 전날 그렇게나 미리 준비하라고 했건만 짐을 하나도 쌓지 않았다. 급하게 씻고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다행히 버스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버스를 타고 나는 책을 읽었고, 아들은 핸드폰을 만 지막 대다가 금세 잠이 들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자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요즘 버스는 참 편했다. 마치 침대에 누운 듯 머리, 허리, 다리까지 섬세하게 살폈다.
차가 막혀서 30분이나 지연해서 도착했다. 늦은 점심은 미리 찾아보았던 애호박찌개국밥집이었다. 사실 아들은 썩 내키지 않아 했다. 애호박의 식감이 별로라 했지만 그래도 함께 가주었다. 식당 안에서도 다른 메뉴를 택하려다 호탕한 사장님의 "애호박집에 왔으면 그걸 먹어야지!" 하는 한마디에 그대로 항복.
맛은 정말이지 끝내주었다. 달달할 거란 예상과 달리 어찌나 칼칼한 지. 안에 돼지고기도 가득하니 푸짐했다. 아들도 엄지 척을 하며 구석구석 깨끗이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터미널로 가서 택시를 타고 주천 안내센터로 갔다.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택시 기사님은 지금이 오히려 둘레길 가기 좋은 때라며 힘을 팍팍 주었다.
예전에 제주도 둘레길도 11월에 갔었는데 날씨도 적당하니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기사님도 여기는 아직 단풍이 남아 있다며 보라는데 알록달록하니 여전히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도착해서 안내센터 직원분께 다시 한번 길을 묻고, 놓여있는 지도도 꺼냈다. 친절하게 밖에 까지 나와서 앞에 있는 팻말 사이로 가라고 안내를 해주었다.
두려움 반, 기대반 그 길을 따라나섰다. 날은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넓은 평야에 덩그러니 둘 만 남았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각자마다 가슴에 품은 기대를 꺼내 놓았다. 아빠는 아들과 떠나는 여행의 설렘을 아들은 잠시나마 공부란 감옥에 해방된 자유를 나눴다. 걷다가 잠시 멈춰 금빛 출렁이는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찰칵 찍었다.
"아빠. 둘레길인데 왜 계속 산을 오르는 거야?"
"그러게. 근데 다 왔어. 힘내."
사실 난 알고 있었지요. 둘레길 1코스는 한 시간 정도 계속 산을 올라야 했다. 그래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은 꽤나 많은 힘이 들었다. 한 달간 꾸준히 저녁 달리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퍼졌을지도 몰랐다. 사정 모르는 아들은 나이 먹으면 체력이 좋아지냐는 말로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랬다.
지나다가 지리산 반달곰을 조심하라는 현수막을 보고 말았다. 겁이 많은 부자는 한참 동안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할지 토론을 했다. 무시, 도망, 죽은 척 등등 여러 방법을 생각했지만 '만나면 죽음이다.'로결론 났다. 무겁다고 놓고 온 스틱이 못내 아쉬웠다. 가뜩이나 사람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인적이 드문 곳이라 좁은 길을 지날 때마다 뭐라도 튀어나올까 두려웠다.
결국 무서움은 이야기로 달랬다. 우리의 대화는 꽤나 재밌었다. 요즘 책에 푹 빠진 아이와 책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쑥 아내를 만난 그때로 갔다가 다시 삶과 죽음의 그 애매한 경계선에 다다랐다. 대중없는 아무 말 대잔치면 어떠랴. 오래간만에 아들과 찐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그 자체로 행복했다. 물론 중간중간 서로를 디스 하며 무딘 칼날을 들이대기도 했지만.
드디어 내리막을 만났다. 내가 진심 사랑하는 오솔길이었다. 둘레길 다운 길을 내려가다 이제는 평지를 만났다. 시골 마을을 지나며 색다른 즐거움이 찾아왔다. 여전히 길에는 우리만 남았고, 신기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울 촌놈인 우리에겐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정체 모를 작물이 무었지 맞춰보고, 농사짓는 모습에 예전에 군대시절 농촌 지원 갔던 라테 이야기도 나눴다.
그러다 장인어른과 왔던 그때의 추억을 꺼내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정확히 이맘때 아버님과 나는 저 꼭대기 어디쯤을 오르고 있었다. 산장의 좁은 침상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도 물티슈로 대충 세수하고 새우잠을 잤다. 아들과 지금처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산장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긴 침묵 속에 빠지기도 했다. 이곳에 다시 오니 13년 전의 추억이 마치 어제와 같이 느껴졌다. 녀석도 시간이 많이 흘러 내가 사라져도 나와 함께 한 이때를 기억해 주려나.
4시간 반을 꼬박 걷고 민박집에 도착했다. 인상 좋은 사장님 부부는 방을 안내하며 얼른 씻고 식사하러 오라고 했다. 방은 넓고 가운데 돌침대도 있었다. 공용 세면장도 따뜻하고 쾌적했다. 간단히 씻고 식당에 가니 푸짐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장을 했다며 김치에 수육과 갖가지 나물 반찬에 만두전골까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이때 빠질 수 없는 막걸리 한통을 주문했다. 덕분에 아들이 따라주는 술도 받아 마셨다. 주도는 역시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주론이 있는데 어설프게나마 두 손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니 역시.
배도 두둑하고, 살짝 알딸딸하니 기분이 구름 위를 떠다녔다. 따뜻한 방구석에 누워 각자 핸드폰 삼매경에 빠졌다. 나는 요즘 애정하는 OTT 드라마를 보았고, 아들도 무언가에 심취했다. 그렇게 잠이 들어 피곤한 하루를 떠나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주변 산책을 했다. 돌담집이 정겨웠다. 지리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마을 곳곳을 흐르고 있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려 가려는데 아들은 잠을 더 잔다고 했다. 맙소사 밤새 숙제를 했다니. 교재를 챙기길래 설마 했는데 대단하다 정말. 아내가 보았으면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갔을 텐데. 아쉽네.
자연이 오롯이 담긴 아침밥상을 깨끗이 비우고 이제는 떠날 준비를 했다. 씻고 방정리를 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섰다. 사장님은 저 멀리서 뛰어나와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곳은 둘레길 2코스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려 운봉읍으로 향했다. 대략 30여분을 걷고, 거기서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님은 먼저 말을 걸며 그 먼 서울에서 왔으면서 짧게 머물다 가서 어찌하냐며 아쉬워했다. 그러게. 학원만 아니면 지금쯤 더 걷고 있으련만. 그러다 점심 이야기가 나왔고 남원에 왔으면 추어탕을 먹어야 한다며 현지인이 가는 맛집을 알려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까지 30여분 걸으면 되었다.
역시 현지인이 추천하는 음식이 최고였다. 된장 베이스에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맛이 혀를 녹였다. 아들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아침만 먹지 않았으면 밥 한 공기 더 먹을 텐데 아쉬웠다.
천천히 걸으며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마지막까지도 지리산 자락의 가을은 유혹의 손짓을 보냈다. 아내에게 사망 선고를 당할 각오를 하고 하루 더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생명 재촉할 필요는 없기에. 버스를 타고 깨다 졸다를 반복하던 중 불쑥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아빠는 너랑 와서 참 좋았어. 우리 다음에 또 올까?"
"그래."
'괜찮아"가 '그래'로 바뀌는 순간, 차오르는 감동으로 아들 손을 꼭 잡았다. '그래' 속에 담긴 여러 의미를 알기에 나는 또 내년 계획을 머릿속에 담아본다. 그저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가득 지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