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두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숙직이었다. 실상 특별한 일은 없지만 퇴근 시간부터 다음날 출근 시간까지 회사를 지켜야 한다. 상부에서 지시받은 사항은 전파하고, 사무실 곳곳을 순찰하고 자정부터 자면 된다. 여섯 시간의 수면 보장이 있음에도 피곤했다. 은근 긴장하고 자서 그런 가. 새벽에 일어나 청사 주변을 돌다가 익숙한 풍경이 다르게 다가와 사진도 찍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하루 당직 휴무가 주어진다. 당직은 싫지만 휴무는 요새말로 개꿀이다. 회사를 떠나기 전부터 무얼 할지 계속 떠올렸다. 때마침 상호대차를 신청한 지리산 둘레길 책이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오케이 도서관을 먼저 가는 것으로.
집에 가는 길 순대를 사갔다. 이상하게 몸이 고되면 어김없이 순대가 당겼다. 요즘 나의 솔푸드이다. 차장 밑에 지난번 마시고 남은 와인을 꺼내 늦은 아침과 더불어 낮술을 했다. 비록 한잔뿐이었음에도 취기가 슬 올랐다.
순간 잠이 쏟아졌다. 이대로 누우면 내 소중한 하루가 그냥 날아갈 듯해서 옷을 갈아입고, 에코백 안에 노트북과 다음 주 독서모임 책을 챙겼다. 햇살은 따스하니 경량 패딩 안으로 스멀스멀 땀이 찼다. 도서관까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공원을 가르 지르기와 공원 옆을 지나가기. 전자를 택했다.
아직 가을이 묻어있는 숲과 떨어진 낙엽을 보니 괜히 아재 가을 갬성이 돋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별의별 사진을 찍었다. 어느새 사진첩에인물 사진은 사라지고 풍경만 가득 찼다. '얼굴은 갈수록 밉지만, 자연은 늘 그대로이니 그럴 수밖에.'라며 자조를 한다. 은근 혼자 놀기 재밌다.
얼마 전 지인이 카톡으로 심리테스트를 보냈다. 테스트 결과 여러 유형 중 '고아'가 나왔다. 일생 추구하는 것이 소속감이라는데. 혼자 남겨진 느끼는 고독감을 두려워한다는데. 어찌나 딱 맞는지. 어릴 땐 무리해서라도 어딘가에 소속되려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리 혼자서도 잘 노는 것 보면 인정하기 싫은 '나이 듦' 덕분일까.
도서관에서 책을 받고, 지리산 둘레길 1,2 코스만 먼저 읽어 보았다. 타고난 길치인 내가 아들까지 건사하고 걸어서 그 먼 길을 가려면 사전 공부가 필수였다. 네이버 지도로 가는 길도 찍어보고, 구간을 대략 머릿속에 구성해 보았다. 잘 안된다. 그냥 부딪치자. 어떻게든 되겠지. 주말이니 앞서가는 사람들 따라가도 되고. 그러면서 은근 책을 덮었다. 예습 끝. 학창 시절부터 선행이 싫었다. 요즘 태어났으면 집에서 구박 꽤나 받았겠지.
발 길이 카페로 향했다. 요즘 심한 글태기를 앓던 중이었는데, 라라크루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나서부터 신기하게 병이 다 낫다. 함께 하는 작가님들 좋은 글도 읽고, 톡방에 오가는 따스하고 재미난 대화를 보거나 참여하며 다시 글을 쓰고픈 힘을 얻었다. 이제는 '워워' 해야 할 정도이니. 글맥이 뚫리니 일상마저 활기찼다. 12월엔 송년회도 있어직접 만나 얼마나 반갑고 즐거울지. 물론 처음엔 몹시 낯가릴 태지만.
시원한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켰다. 익숙한 커피내음이 코를 찔렀다. 무얼 쓸까 고민하다가 온라인 매일글쓰기 방에서 진행하는 메일링 서비스 글을 작성해 보았다. 이번 기수에 자원해서 편집부에 들어갔다. 나를 포함 총 네 명이서 에세이도 쓰고, 정보성 글도 작성해서 격주로 회원들에게 메일로 보낸다. 이번에 내가 맡은 부분은 정보성 글이었다. 사전에 자료 수집도 하고 정리도 해 놓았기에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새로이 편집부에 참여하며 대학 때 편집부 생활이 많이 떠올랐다. 멋도 모르고 들어가 1학년 때는 주로 주변 상점에 스폰받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는데, 2학년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다. '초성'이란 과 소식지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선후배 인터뷰도 하고 기획 기사도 작성했다. 물론 일보단 술 마시고 노는 일이 다였긴 하지만.
과가 학부로 바뀌면서 동아리가 사라져 한 기수 밑에 학번까지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다. 20여 년이 훌쩍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멤버 리멤버로 1년에 한두 번씩 만나서 그때를 추억하면 지낸다.
완성본을 편집부에게 메일로 보내서 검토를 부탁했다. 특별한 수정 사항이 없으면 이번주 금요일에 발송될 예정이다. 글이 나가면 카톡방이 한바탕 시끌벅적 해진다. 그런 분주함이 좋다. 은근 뿌듯하기도 하고. 이번엔 어떨 반응일는지. 그래도 숙제를 끝내 놓으니 후련하네.
나는 남이 일할 때 노는 게 참 좋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이 이상하게 토요일에 일하고, 월요일에 쉬었다. 처음엔 불편하기도 했는데 나중엔 그 시간이 소중했다. 일상이 가장 바쁜 월요일에 노니 낮에 어딜 가도 덜 붐비고 여유로웠다. 지금도 그때처럼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글 쓰고 있다.
하지만 이제 자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내의 지령으로 아들이 이번에 처음 가는 학원을 따라가야 한다. 중간에 서점에 들러 교재도 사고, 밥도 먹고, 학원에선 상담도 잡혔다. 한바탕 잘 놀았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 미적대다가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