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방향이 '나'에게로 향한 내향인의 은밀한 강점

내향인이기에 강점이 될 수 있는 바로 그것

by 실배

본사에서 내려온 문서 하나가 사무실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앞으로 정확히 한 달 반 뒤, '고도화 프로그램 경진대회'란 명칭으로 대전에 모여 기관별로 직접 개발한 비행예방 고도화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그걸 순위로 매겨서 기관 평가에 반영한다는 내용이었다.


1위부터 꼴찌까치 점수 편차가 상당했고, 그 점수로 인해서 그동안 쌓아온 실적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무실 분위기가 술렁대더니 직원 간 눈치보기가 시작되었다. 그 업무를 맡게 된다면 엄청난 부담감에 짓눌릴 것이 뻔했다. 종국엔 승진부터 성과급까지 모두 거기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곧 계획서를 제출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때 갑자기 기관장의 호출이 있었다. 문을 열자 입을 굳게 다문 심각한 얼굴을 마주했다.


"실배선생이 이번 발표를 맡아 주어야겠어."

"네? 제가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

"일단 그렇게 알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 진행하시게. 내가 TF팀을 구성하라 지시했으니 도움을 받으면 한결 수월할 걸세."


하필 나였을까. 숱한 반문을 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다만 전에 기관장이 과장시절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고, 그때 외부 강의를 몇 번 나간 적이 있는데 작용했다면 그것뿐이었다. 조직 안에 있다면 상부의 지시는 따를 수밖에. 더구나 되돌릴 시간마저 부족했다.


나로 인해 광명 찾은 나머지 직원들 얼굴에 활짝 핀 꽃들을 뒤로 한채 그때부터 매일 야근에 돌입했다. 비록 TF 팀이 구성되었다고 해도, 자료 수집 정도만 도움 받을 뿐 모든 것은 나의 몫이었다. '고도화'란 말의 뜻에 맞게 기존 프로그램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무언가가 필요했다. 매주 교육생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지만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교육 의지도 없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도 부족한 비행 청소년들에게 눈을 뜨고 책상에 앉아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적과도 같았다.


처음엔 그저 기존 프로그램에 조금 수정 보완할 요령이었다. PPT를 예쁘고 꾸미고, 그럴싸한 자료를 모아 조합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날도 야근을 하던 중 아직 퇴근 안 한 후배와 머리도 식힐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님 프로그램은 잘 되어 가세요?"

"아니. 막막해. 시간도 부족하고, 그냥 기존 것을 조금 업그레이드하는 정도로 끝낼 듯 해."

"정말 고생 많으세요. 혼자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죄송하기도 하고. 제가 궁금해서 그런데 교육할 때 어떤 게 가장 효과적이었어요? 요즘 제일 고민이네요."

" 음.... 솔직히 내 이야기만 하는 강의식 교육은 이젠 아닌 것 같고, 그나마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또 체험하는 교육이 그나마 나은 듯해."

"그래요? 그럼 그걸 구성해 보면 어떨까요?"


순간 머릿속에 강렬한 불꽃이 파닥하고 일었다. 후배의 질문은 일종의 촉매제였다. 그때부터 나를 향해 수십 개의 질문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고도화를 잘 만드는 것을 넘어 실제 교육 현장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 아닌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는 프로그램, 거기에 체험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하나 더 다양한 비행별 유형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도 필수였다.


그동안 진행해 온 프로그램을 과감히 휴지통에 모두 버렸다. 그리곤 떠오른 생각이 사라질세라 과거에 활용했던 기법 하나를 찾아냈다. 몇 년 전 폭력 가해 학생들을 향해 활용했던 방법인데 구체적인 시간대별로 나의 사건을 기록해 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세하게 시작부터 결론까지 상황별로 작성해야 했다. 기존엔 거기서 끝이었는데 결정적 하나를 더했다. '고리 끊기'라 칭했던 그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직접 끊어보는 작업이었다.


폭력, 절도, 교통안전, 교권침해 등등 각각의 유형 모두에 적용가능 했고,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문제점과 해결점을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비행청소년 교육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자기 잘못에 관해 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육 때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이 '그냥요.', '친구가 하자고 해서요.', '몰라요' 등등으로 답하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잘못한 사건을 기록하고, 잘못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찾는 과정은 크게 보면 다음 비행을 미연에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2차시로 만들어야 할 프로그램의 1차시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럼 2차시는 1차시를 바탕으로 그걸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또다시 나를 향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좋을까.', '무엇이 효과적이었나.', '반드시 체험과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은' 등등.


내향형이기에 에너지를 내 안으로 쓰는데 용이했다. 즉흥적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산하는 외향형에 비해 시간은 걸릴지 모르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그날부터 곱씹고, 떠올리고,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심지어 수업을 할 때도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 어떤 일화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강의 듣는 아이들이 너무 피곤해하길래 전 시간에 미술치료 선생님이 남기고 간 점핑클레이를 만지고 놀라고 했더니 깊은 잠에 빠져있던 아이까지 모두 일어나 반짝거리지 않던가.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며 냄새도 맡고 계속 조물딱 거렸다. 어떤 아이 하나는 그걸로 꽃을 만들었는데,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실제 같았다.


그래, 바로 그거였다. 점핑클레이는 1차시 '고리 끊기'를 이어받아 마무리할 2차시 프로그램의 핵심이 되어 주었다. 꽃을 만든 어느 아이의 창작을 활용해서, 나의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그걸 점핑클레이로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작품 만들기를 넘어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했다. 예를 들어 '폭력은 쇠창살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면, 그걸 점핑클레이로 완성하고 '그건 지금처럼 나를 가두는 것이기 행동이기 때문이다.'까지 이유를 설명하는 식이다. 쉬운 듯 보여도 깊은 성찰이 없다면 해낼 수 없는 작업이기도 했다. 1차시에서 충분히 워밍업을 해야 가능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 일이 한순간에 풀렸다. 그날 야근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모두 완성했다. 그 시작은 후배가 던진 질문하나였다. 돌이켜보면 후배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통했음이 분명했다. 내친김에 한글로 계획서까지 모두 완성했다. 다음날 기관장에게 보고했고, 무사통과였다. 자료를 곧바로 본사 담당자에게 메일로 송부했다. 기한이 정확히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2차 과제는 본 프로그램을 15분으로 요약한 PPT 발표자료를 완성해야 했다. 도합 4시간을 단 15분 만에 모두 집어넣고 이해시키는 일은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과제였다. 일단 만든 프로그램을 수업에 계속 적용해 보았다. 사례를 차곡차곡 계속 쌓아가고, 그 안에서 뽑아낼 이야기를 찾았다. 교육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저 나는 판 만 깔아주었을 뿐인데, 그 안에서 아이들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좋았다. '나의 사건'을 발표할 때 울컥하는 몇몇 아이를 보며 나 또한 눈시울이 붉어지고 했다. 생각 안에서만 떠돌던 것이 실제 눈앞에서 효과로 증명되니 자신감이 생겼다.


막연히 예쁘게, 멋있게 꾸미려던 PPT 발표 자료는 방향을 360도 틀었다. 이 프로그램의 시작점이 무엇이더냐. 그건 바로 '질문'이었다.


나로서 전에 시도한 적 없는, PPT만 보아선 이해하기 어려운 유일무이한 발표 자료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으니.





한 줄 요약 : 모든 문제의 답은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달려있다.






#라라크루, #라라크루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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