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15분의 발표 시간이 남았습니다

내향인 강사에게 필요한 건 몇 번의 성공경험이다.

by 실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15분'이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습니다.'라며 비장한 각오를 비쳤던 이순신 장군처럼 그날도 야근하며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간 안에 개발한 프로그램 전부를 보여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통상의 PPT자료라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요약해서 넣고, 군데군데 애니메이션 효과를 통해 포인트를 주는 형태였다. 그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여 개의 기관에서 분명 그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으려나. 심지어 일부 기관에서는 PPT를 외주에 맡겨 꾸미기에 혈안이 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현란한 말솜씨로 좌중을 사로잡을 카리스마도, 그렇다고 PPT를 멋들어지게 꾸밀 손재주도 없는 그저 소심한 내향인으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 내내 고민되었다. 산 넘어 산이란 표현이 딱 맞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유튜브로 강의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스티브 잡스가 강의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PPT안에 덕지덕지 많은 내용을 담지 않고, 임택트 있는 단어나 문장 한 줄 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함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저거다!'를 외쳤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수없이 나에게 던진 질문 내용을 역으로 활용했다. 일단 배경을 까맣게 만들고, 질문은 하얗게 만들었다. 이런 식이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가장 고민되는 점은?'이라고 PPT에 질문을 띄운다. 그리곤 청중에게 실제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다음에 답은 사진으로 대체했다. 아이들이 교육장에서 졸거나 자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의를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공감과 더불어 반드시 웃음도 터트릴 것이다.


다음 질문은 '교육 프로그램 중에서 아이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것은?' 아마도 이번 답은 쉽게 맞출 것이다. 정답은 체험교육인데 직접 주기보단 통계자료를 활용했다. 교육생이 수료할 때 작성하는 만족도 조사와 소감문을 편집해서 직접 화면에 띄우며 객관성을 더했다.


질문의 마지막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내가 소개할 프로그램에서 다른 곳에 없는 것은?' 이에 관한 답은 아마도 쉽지 않을 듯하다. 반응을 듣고 이번에 띄운 답은 '교육생의 잠,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 영상자료'이다. 이쯤되면 청중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행청소년을 교육하는데 잠을 자지 않는다고?, 교사가 직접 강의를 안 해도 된다고? 더구나 만능키 영상자료가 없다고?'


잔뜩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나씩 답을 찾아간다. '나의 사건기록하기'는 실제 교육생의 사례 중에서 발췌했다. 이때 '고리 끊기'는 청중에게 질문을 통해서 끊어보도록 구성했다. 직접 해봐야 그 효과를 알 수 있을 테니.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사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잘못하지 않을 가능성을 찾아 끊으며 향후 비행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의 핵심인 점핑클레이를 활용한 '나의 사건 정의 내리기'는 사례와 짧은 역할극을 만들어보았다. 그간의 강의를 통해서 사례가 주는 거대한 힘을 보았다. 직접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의 작품을 화면으로 구성하였고, 각각에 담긴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수업 중 어떤 아이가 거북선 모양을 만들었기에 물어보았는데 '학교폭력은 상처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빼꼼히 나온 얼굴에는 가시가 잔뜩 꽂혀있고, 몸은 통 같은 곳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학교폭력위원회에서 최종 판결을 받은 뒤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어머니가 거실에서 고개를 숙인 채 펑펑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고, 죄송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며 그 아이 또한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 나 또한 어떤 말을 해야 하나 한참을 머뭇거렸다. 선뜻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다.


후배 하나를 섭외해서 그 상황을 짧게 극으로 꾸며 발표 때 보여주기로 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여러 내용이 필요 없었다. 그 장면 하나를 보여주면 청중도 평가하는 이도 분명 마음이 움직이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15분간의 발표자료가 완성되었다. 그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강의실에 남아 수도 없이 시연을 반복했다.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불안이 파고들 틈조차 없이 조금 과장해서 누르면 바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발표 전날에는 소장님과 직원들 앞에서 모의시연을 했고 그들의 반응 속에서 준비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발표날이 다가왔다. 100여 명도 넘게 참여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이었다. 전국에서 온 기관장과 직원들이 자리를 채웠고, 평가 위원은 교육대 교수들을 포함해서 본사 관할팀장 등 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주는 점수를 통해 운명이 결정되었다. 내 차례는 중간정도 되었다.


평소 같으면 몹시 떨며 긴장할 텐데 이날은 흥분을 주체 못 했다. 앞선 발표들은 내 예측 한도 내에 있었다. 강의를 들을수록 내 자료에 대한 확신을 더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다. 새까만 화면에 질문이 하나가 나타난 순간, 강의장은 웅성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평소 안면 있는 직원들에게 답을 청했다. 당황, 머뭇, 웃음이 한데 버무려져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그렇게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질문하고 답을 하는 소통형 강의를 이어갔다. 질문 하나하나에 모두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평가 위원 눈들도 무언가 새로운 걸 보았다는 듯 반짝였다.


클라이맥스였던 점핑 클레이 상황극은 대성공이었다. 후배 역시도 내향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연극배우 못지않았다. 그저 놀잇감으로만 생각했던 점핑클레이가 훌륭한 체험 교육자료로 둔갑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15분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뜨거운 박수가 나왔다. 이어지는 총평에서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활용하기 좋으면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만드는 내용이 의미 있었다는 말에 뿌듯했다. 프로그램의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강의가 끝나고 기관을 대표로 발표에 참여한 직원들끼리 뒤풀이를 했는데 그곳에서도 발표와 프로그램이 단연코 화제였다. 여러 곳에서 직접 활용해보고 싶다며 메일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끝났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좋은 반응으로 돌아와 그간의 노고가 조금은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날은 편한 마음으로 함께 고생한 직원들과 회포를 풀었다.


발표 결과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공문으로 나왔다. 떨리는 마음에 실눈을 뜨고 문서를 열었는데, 맙소사 우리 기관이 제일 상단에 위치했다. 1등을 한 것이다. 곧바로 전 직원이 소장실에 모여 기쁨을 나눴다. 기관 가점까지 받아서 최종 기관 평가에서도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도 모두 사라졌다.


이후에 본사에서 연락이 와서 비행예방센터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싶다며 권역별로 직원들 보수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프로그램명도 '자기 주도 비행단절 훈련'이란 멋들어진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 전국을 돌며 직원 교육을 하는 호사를 누렸다.


10여 년이 다 되었음에도 지금도 그때를 기억하는 직원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발표대회 덕에 직장 내에서 강의하는 사람이란 긍정적 이미지가 생겼다.


그 타이틀은 내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주었으니. 교육부와 법무부 강사를 망라한 '우수 강의안 경진대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한 줄 요약 :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때론 뒤집어 보 답이 될 수가 있다.



#라라크루, #라라크루라이팅








이전 07화에너지 방향이 '나'에게로 향한 내향인의 은밀한 강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