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크고 가장 좋은 점은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 아닐까. 선거로 인한 휴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이들과 아점을 챙겨 먹었다. 두 아이 모두 학원 보강이 있기에 우리 부부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투표를 했다. 점심 때라 그런지 한산했던 공간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손도장을 인증하려던 나에게 아내는 누가 요즘 그런 사진을 찍냐며 '망그러진 곰'을 검색해 보란다. 곰이 있는 용지 안에 표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라는데 자꾸 뒤처지는 난 옛날사람이 되어간다.
다음 목적지는 삼청동이었다. 아미인 아내는 최근에 BTS 리더 RM이 휴가 나와 갔던 국제갤러리 김윤신 개인전과인증샷까지 찍은 삼청동 호떡을 복습하고 싶단다. 아내와 둘이 데이트할 수 있는 찬스이기에 어디든 좋다고 했다.
광화문 역에 내려 천천히 걸어가던 중 국립현대 미술관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가보니 '백 투더 퓨처'란 이름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탐험하는 무료 전시회가 열렸다. 안내 데스크에서 표를 받아 입장했다.
잠시 둘러보던 중 도슨트의 해설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림 하나에 담긴 깊은 의미를 들으며 바라보니 훨씬 풍성했다. 개인적으론 박이소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 <베니스 비엔날레>,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위~10위> 등 예술은 세상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란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마지막 작품까지 거의 1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국제갤러리로 가는 길에 무수히 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이제 정말 코로나가 종식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마치 이곳이 외국 같다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김윤신 작가의 작품은 색감이 다채롭고 멋졌다. 다만 도슨트의 해설이 없어서 그림에 담긴 메시지를 알 수 없다란 점이 아쉬웠다. 아내가 작품 사이를 가는 뒷모습을 찍었는데, RM이 찍은 사진가 구도가 비슷하다며 칭찬을 들었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좋지. 천천히 작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의도치 않게 BTS RM이 찍은 사진과 구도가 비슷했다
네이버 길 찾기까지 동원해서 호떡집을 찾았다. 좁은 골목길을 가다가 중간에 매장에서 양말도 사고, 기다랗게 줄 선 음식점의 메뉴는 무언지 구경하며 딴짓을 했다. 곱게 핀 꽃 앞에서 사진도 찍고.
그러다 골목 끝에 있는 호떡집을 발견했다. 주문과 동시에 만들기 시작한다는데 몹시 호탕한 사장님이 재밌었다. 호떡을 들고 찍었는데 이번엔 작게 나왔다며 꾸중을 들었다. 이미 한입 베어 물어 다시 찍을 수도 없고'다음엔 잘 찍을 게요.'라며 표정으로 사과할 수 밖에.
BTS RM이 찍은 호떡 사진과 너무나 달랐던
남은 시간은 예쁜 카페에서 보내기로 했다. 길 가다가 한옥으로 꾸며진 곳이 눈에 확 띄었다. 야외에 햇볕이 잘 드는 공간에 자리 잡고, 나는 와인 한잔을 아내는 자몽주스를 주문했다. 인스타 감성으로 사진도 찍고, 펼쳐진 이국적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며시 손도 잡으니 뜨거웠던 연애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아내는 이 카페에서 우리가 가장 나이가 많다며 자중하라는데 그럼 어떠랴.
딱히 무얼 하지 않아도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 그 자체로 행복했다. 희망적인 건 앞으로 이런 시간이 늘어날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인왕산 둘레길로 잡았다. 아내는 이미 트레킹화도 주문했다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나로선 엉덩이가 들썩일 만큼 설렜다. 4월 말로 거사일을 정했다.
돌아올 때 일부로 인사동을 들러 크게 돌아갔다. 코로나 시절 썰렁했던 인사동을 기억하는 나로선 지금의 북적거림이 감사했다. 그동안 보지 못한 낯선 공간도 보였다. 상인들의 생기로운 모습에 한 움큼 기분이 좋아졌다.
동네에 도착해선 둘째가 좋아하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과 첫째가 먹고 싶다던 치킨도 샀다. 이제 다시 아빠, 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충실히 하루를 살아내다 언젠가 지금처럼 탈출할 그날을 꿈꿔 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