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에 도착했다. 아들은 샤워하는 중이어서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말하며 연신 눈을 아래로 향했다. 딸이 숨어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딸은 내가 집에 오면 꼭 테이블 의자 밑에 숨는다. 나는 숨 쉬듯 자연스러워 순간 까먹었다. 고개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딸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딸은 빠져나오며 쇼핑 크림보다 달콤한 미소를 꺼냈다. 순간 내 안의 피로는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갔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내 아내와 나의 대화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내가 한마디 하면 두세 마디로 가로막았다. "아니야.", "왜 늘 그런 식으로 말해.", "아니 거든.", "다 틀렸어." 등등 사사건건 태클 걸었다. 처음엔 그냥 장난이려니 하며 넘어갔다. 그런데 슬슬 감정 상하는 것이 아닌가. 애써 무시하려다가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해라."라며 싸늘하게 말해해 버렸다. 딸은 움찔하더니 이내 "피. 나는 엄마가 제일 좋아."라며 엄마 품에 쏙 안겼다. 아.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다. 딸아 너 아빠한테 왜 그러니.
늘 애교 듬뿍으로 보기만 해도 미소 짓게 했다. 수많은 단어 속에서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했다. 안에 천사가 10명 정도 들어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그 변화의 조짐은 겨울 방학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전보다 눈에 띄게 짜증이 늘었다. 무엇을 해도 쉽지 않았다. 부쩍 부적 감정 표현이 많아졌다. 전에 물 먹는 것보다 쉬웠던 뽀뽀는 미적분보다 어려웠다. 늘 먼저 달려와 안아 주었는데, 이제는 손만 닿아도 싫은 티를 냈다. 아. 서운하여라.
이제 자아가 성장하는 단계에 진입한 걸까. 하긴 아들에게서도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 내가 아는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변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점점 그 모습에 적응했다. 시간이 지나고 파도는 잠잠해지며 '성장'이란 이름으로 다가왔다.
한번 경험했음에도 왜 이리 서운한지 모르겠다. 영원히 귀엽고, 착한 아이로만 남길 바라는 헛된 꿈을 꾼다.
아니야 안 돼. 있는 그대로 지지하고 받아줘야 해. 우. 어려워. 나도 모르게 화낼까 무서워. 그 아름다운 반달눈이 그리워. 곧 여행 마치고 돌아오겠지. 내가 더 다정스레 다가가 볼까. 뭐든 해야 될 것 같은데. 에고. 모르겠다. 빨리 이 시기가 지나갔으면. 그나저나 너 벌써 이러면 나중에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