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계주 대표가 되고 싶어 했다. 다른 것은 욕심 없는 녀석이 유독 달리기만 달랐다. 아내는 6학년 계주 대표는 맨 마지막에 달린다고 했다. 생각만 해도 떨린다고 호들갑 떨었다. 심지어 만약 대표가 되면 못 보겠다며 운동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룬. 마침 나는 저녁 운동 갈 예정이었다. 아내는 아들 데려가서 달리기 연습시키라고 지시했다. 오케이.
그때였다. 아들이 나를 달리기에서 이길 수 있다고 도발했다. 뭐지. 가슴속에서 불덩이 하나가 쑥 튀어 올랐다. 어쭈. 네가 나를? 내 비록 40대 중반의 중년 아재지만 아직 너에게 질 생각은 없는걸.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내기로 번졌다. 나는 어깨 마사지 이용권을 아들은 내 폰으로 30분 게임 이용권을 내밀었다. 오케이. 콜. 딸은 옆에서 심판 보러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달밤에 운동하러 떠났다.
안양천은 달빛 가득 받아 낮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곳곳에 운동하는 사람이 보였다. 내 심장은 아까부터 세차게 뛰었다. 최근에 같이 뛰어본 적이 없었다. 설마 지는 것은 아니겠지? 나를 이기고 의기양양할 아들 녀석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니야.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은 지고 싶지 않았다. 이길 수 있어. 마음에 주문을 걸었다. 드디어 결전 장소에 도착했다.
승부는 운동장 한 바퀴였다. 딸을 결승점에 남겨둔 채 우리는 출발선 앞에 섰다. 얼마만의 가슴 떨림인지. 본능적으로 온몸 구석구석 힘이 들어갔다.
시작 구호와 함께 튀어 나갔다. 스타트는 아들이 빨랐다. 나보다 반 박자 앞서 나갔다. 안돼. 나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한발, 두발 조금씩 격차가 줄어들었다. 아들은 연신 고개를 뒤로 돌리며 나를 확인했다. 이미 내 다리는 내 통제 밖이었다. 기계처럼 내달려 결국 아들을 앞질렀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계속 달려야 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전속력으로 달려본 것이 얼마 만인지. 저녁 바람에 내 이마는 차갑게 식었다.
슬쩍 뒤돌아보니 아들이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오는 것이 아닌가. 반칙이었다. 이 녀석.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결국 내가 이겼다. 힘든 승부였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휴 하고 거친 숨 먹으며 크게 한숨 내쉬었다. 아들도 지쳤는지, 내 옆에 앉았다. 두 눈 똑똑히 결과 본 딸은 둘이 비겼다고 우겼다. 오빠 편인 딸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들, 딸과 함께 천천히 운동장을 돌았다. 둘은 번갈아 가며 쉬었고, 나는 목표했던 10바퀴를 모두 채웠다. 우리는 주말에 이렇게 계속 뛰기로 했다. 운동이 부족한 아내도 다음번에는 데려오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 아들은 분한 마음으로 다음에는 꼭 이기겠다고 했다. 그 모습에 겉으로는 미소 지어 보였지만, 솔직히 긴장되었다. 그래. 언젠가는 내가 패배하는 날이 오겠지. 그런데도 쿨하고 인정할 수 있을까. 자꾸 마음은 반반이었다.
달밤 승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