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다가오며 내 손은 바빠졌다. 전 날 아들이 일찍 퇴근하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서둘러야 했다. 제대로 마무리했는지 확인도 못한 체 던져두고 나왔다.
해가 길어졌다. 늘 달을 벗 삼아 가는 길이 밝으니 어색했다. 아니야. 익숙해져야 해. 자꾸 이런 마음이 늦은 퇴근을 합리화한다. 집에 도착하니 아직 아들은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식사 마치고 딸과 시간 보냈다. 딸은 이번에 독서 일기장 잘 써서 상 받았다며 내가 좋아하는 반달눈을 지었다. 나는 어떤 상보다 책과 관련된 상이 좋다. 딸에게 뽀뽀 연타 발사하고 꼭 안아 주었다. 참. 기특했다. 아내가 설거지하는 중 나는 빨래를 갰다. 드럼 세탁기로 바꾼 후부터 세탁 후에 옷에 먼지가 많이 붙는다. 돌돌이로 연신 돌려보아도 시원찮다.
그 사이 아들이 도착했다. 늦은 식사하고 숙제하고 나니 어느새 밤 10시가 다 되어갔다. 더구나 잠시 게임도 하겠다고 했다. 마음이 바빴다. 평소 같으면 빨리 하자고 닦달했겠지만, 성숙한 아빠가 되기로 마음먹은 1일이라 어금니 꽉 깨물며 기다렸다. 결국 밤 10시 반이 되어서야 노트북에 함께 앉았다. 휴.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과 내일 있을 과제 발표 PPT를 만들었다. 아들이 꺼낸 주제는 '큐브'였다. 얼마 전부터 큐브에 빠진 아들은 유튜브까지 보며 열심이더니, 공식까지 외웠다. 몇 번 보여주었는데 신기했었다. 아들 주제 good!
먼저 목차를 구성했다.
1. 큐브는 무엇인가?
2. 큐브 빨리 맞추는 법
3. 큐브와 관련된 기타 정보(아들이 정했는데 뭐지??)
4. 큐브 퀴즈(나는 앞에 배치하길 원했지만....)
목차 구성도 쉽지 않았다. 다른 것은 그런대로 합의했지만, 큐브 관련 퀴즈에서 의견이 갈렸다. 나는 예전 강의할 때 본 프로그램 시작 전에 퀴즈를 많이 활용했다. 그러면 시선 집중, 호기심 유발 효과가 있었다. 아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요즘에는 끝에 넣는 것이 대세라고 우겼다. 평소 같으면 협박, 윽박 등을 동원해서 설득했겠지만, 나는 성숙한 아빠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 아들 의견을 따랐다. 아들이 발표할 자료니깐 본인 원하는 데로 가는 것이 맞았다.
본격적인 구성에도 계속 삐거덕댔다. 아들은 텍스트 중심을 원했고, 나는 그림, 영상 등 시각적 효과를 주장했다. 결국 절충해서 텍스트 반, 시각적 효과 반으로 구성했다. 특히 큐브 빨리 맞추는 방법에서는 아들이 먼저 텍스트로 공식을 설명하고, 나는 핵심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만들어 삽입했다. 아들은 발표 때 직접 큐브 가지고 시연하기로 했다. 조금씩 합이 맞춰지고 마지막 퀴즈 구성에서는 둘이서 신났다. 서로 재밌는 아이디어 내며 깔깔댔다. 아직 PPT가 익숙지 않은 아들에게 완성된 PPT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연시켰다. 잘할 수 있겠지. 아들은 뿌듯한 마음에 아내에게 보여주겠다며 갔다가 자고 있던 아내에게 철퇴 맞았다. 쯧쯧. 귀여운 녀석.
어느덧 시간은 11시가 훌쩍 넘었다. 아들은 씻고 나올 때까지 자지 말라고 부탁해서 기다렸다 함께 누웠다. 내일 발표에 대해 잠시 이야기 나누던 중 아들은 피곤한지 금세 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티격태격, 왁자지껄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았다.
그나저나 성숙한 아빠 되기 1일 차 쉽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