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남 생일이 있었다. 한창 바쁜 때지만 칼퇴근했다. 갈 때는 주저 없이 가는 것이 좋다. 괜히 어영부영하다가는 시간만 뺏길 뿐이다.
월요일 퇴근길도 사람들로 바들댔다. 평일에 이렇게 일찍 나선 적이 없어서일까 익숙한 길조차 생소하게 다가왔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놓고 음악을 들었다. 비좁은 공간 탓에 다른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득 찬 사람들이 주는 열기로 지하철 안은 후덥지근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힐 찰나에 내릴 때가 되었다. 지하철 밖을 나가보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야 숨을 쉴 것 같았다.
장소는 집 근처의 뷔페였다. 나는 사실 한 가지 음식을 집중해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이상하게 뷔페를 가면 과식하게 되고 나중에 속이 더부룩함을 겪는다. 처가댁은 다양한 음식 먹는 것을 선호한다. 뭐. 음식의 기호는 저마다 다른 것 같다.
거의 동시에 우리 가족은 모였다. 결혼은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다. 나에게는 처가댁이, 아내에게는 시댁이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가족이 생겼다. 결혼을 통해 생성된 가족은 갑작스럽기 때문에 여러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하긴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가족도 마냥 좋고 잘 지내는 것만은 아니니깐.
나는 1년간의 짧은 신혼생활을 거친 후 바로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다행히 좋은 장인, 장모님 덕분에 8여 년의 시간은 불편함 없이 지나갔다. 그래도 초반에는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살아온 가족과는 너무 다른 삶의 방식이 어색했다. 중앙집권적 원 가족에서 지방 분권적 신 가족으로의 이동은 적응이 필요했다.
우리 집은 강력한 부모님 밑에 자식들이 의견을 개진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처가댁은 각자의 의견이 있고 그것이 존중된다. 언젠가 농담처럼 아내에게 아메리칸 스타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서로 크게 관여하지 않지만, 관심의 큰 테두리 안에 있다. 덕분에 나도 건전한 분리를 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 과정이 마냥 쉽지 않았다. 나의 변화에 부모님은 적잖이 당황하셨다. 그 당황이 나중에는 분노로 돌아왔다. 지금에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때 다짐했던 것이 있다. 그래 내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그러면 언젠가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날이 오겠지.
강산이 변했다. 그다지 잘 사는 모습을 보인 것 같진 않지만, 시간이라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서로 한걸음 물러서 바라보는 요즘이 더없이 좋다. 우리는 변함없는 가족이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지울 수 없다.
처남의 생일을 마친 후 집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집에 모두 모여 생일 축하 노래와 케이크에 촛불을 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익숙했던 장면인데 이제는 생소했다. 장인, 장모님은 3년 전 분가하셨다. 시간은 함께 했던 기억을 흐리겠지만 새로운 가족이 되어 서로를 잇는 다리는 건실할 것이다.
두 분이 떠난 자리는 오롯이 우리 가족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앞으로 기쁜 날, 슬픈 날 모두 함께할 것이다. 그리곤 때가 되면 이별하겠지. 나는 쿨하게 보내주고 싶다. 뒤돌아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 허전함에 마음 아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