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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May 14. 2022

나의 비빔밥 크로니클

내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된 음식이 있다.


입맛이 없거나 특별히 먹고 싶은 반찬이 없을 때면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간장 계란 비빔밥’이다.

특별히 요리라고 하기도 민망한 너무나도 쉽고 간단한 음식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신 간장 계란 비빔밥은, ‘스뎅’ 대접에 갓 지은 밥을 넣고, 계란 프라이를 넣고 ‘왜간장’이라고 부르던 양조간장을 한 스푼, 참기름 한 스푼, 참깨를 솔솔 뿌려 슥슥 비벼 먹는 음식이었다.


굉장히 단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니가 농사지어 수확한 맛있는 쌀로 만든 밥에, 직접 농사지어 짜낸 참기름과 참깨를 넣고 비벼먹는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가 있는가 싶다. 처음 이 음식을 먹었던 것이 여섯, 일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쯤인가, 처음으로 간장 대신 고추장을 넣어서 먹게 되었다. 모든 재료는 똑같이 하고 간장만 고추장으로 바꿨을 뿐인데 이게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나는 그 뒤로 간장보다는 고추장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쯤부터는 나도 직접 먹을 만큼 밥을 퍼서, 양념통에서 고추장과 참기름, 참깨를 꺼내어 내가 먹고 싶은 만큼 양념을 넣어 만들어 먹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이제는 직접 ‘계란 프라이’를 프라이팬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계란 프라이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이 고추장 비빔밥의 맛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계란 노른자를 반숙으로, 어떤 날은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서 충분히 익혀서 계란의 바싹 익은 고소한 맛을 즐기고는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물을 넣어먹으면 더 맛있다며, 강원도에 사는 큰어머니가 직접 산에서 뜯어서 요리하신 고사리며 각종 이름 모를 나물들을 권하셨다. 고기를 좋아하고 야채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야채를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나물을 넣어서 먹어보기 시작했다. 아니 웬걸, 내가 생각했던 맛과는 정말 달랐다. 고사리나물, 참나물, 비름나물, 고춧잎나물, 비름나물, 심지어는 무말랭이를 넣어서 비벼 먹어도 비빔밥의 맛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이때부터 나는 집에 나물이 있다면 나물까지 넣어서 어느 정도 비빔밥의 형태를 갖추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빔밥’이라는 메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식당에 가서도 비빔밥이라는 메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솥비빔밥’이라는 메뉴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저건 뭐지? 어려서부터 자주 왔던 식당인데 내 눈에는 그 메뉴가 처음으로 보인 것이다. 엄마의 설명으로는 뜨거운 돌솥에 비빔밥을 넣어 비벼 먹는다고 했다. 사실 비빔밥을 돈 주고 밖에서 사 먹을 음식인가? 하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했던 것 같은데, 돌솥비빔밥은 정말 꼭 해보고 싶은 경험으로 다가왔다. 뜨거운 돌솥에 밥과 나물, 계란과 양념을 넣고 비비니 지글지글 익는 소리가 들리면서 너무나도 황홀한 느낌이 들었다.


나물이나 야채를 넣고 비빔밥을 비벼서 먹다 보면, 나물이나 야채에서 나온 수분들이 밥을 질게 만들거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돌솥이 그러한 수분을 날려주니까 더 맛있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따뜻하게 비빔밥을 끝까지 먹고,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긁어먹는 맛은 비빔밥을 비로소 ‘요리’의 레벨을 끌어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집에서도 돌솥비빔밥이 먹고 싶을 때는 뚝배기를 이용하여 비빔밥을 먹게 되었다. 뚝배기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약불로 달군다음 그 위에 밥과 나물, 양념을 넣고 계란 프라이를 하나 올려서 먹으면 웬만한 식당에서의 돌솥비빔밥 같은 근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셀프 비빔밥은 진화했고, 대학생이 되면서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의 가장 큰 단점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라면도 끓여먹을 수가 없고, 계란 프라이도 할 수 없었다. 배고플 때 간단히 후딱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을 못 먹는다는 것은 내게 큰 시련이었다. 셀프 비빔밥에 대한 그리움은 태어나서 처음 집을 떠나 살면서 더욱 커져갔고,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까지 번져갔다. 기숙사 식당에서 나오는 밥은 영양 균형은 맞겠지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다.


대학생의 뻔한 용돈으로 매 끼니를 밖에서 맛있는 것만 사 먹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시험기간이 되면 밥을 먹으러 가는 시간도 모자라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기 일쑤였다. 편의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삼각김밥이었다. 워낙 빵보다는 밥을 좋아했기 때문에 삼각김밥을 먹으면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의점 삼각김밥에서 ‘전주비빔밥’ 맛의 삼각김밥을 발견했다. 사실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그다지 편의점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관심 있게 본 적도 없었다.


아니 내가 살던 동네에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편의점이 없었기 때문에 편의점 자체가 나에게 익숙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전주비빔밥 삼각김밥’이라니! 비빔밥을 편의점에서 그것도 삼각김밥 형태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대학생 시절, 나의 편의점 최애 조합은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사발면 뚜껑 위에 삼각김밥을 올려 따뜻하게 데워서 먹는 조합이었다. 사발면을 반쯤 먹고, 삼각김밥을 반쯤 먹었을 때, 남은 삼각김밥을 사발면에 말아먹으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잔디밭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기회가 생겼다. 한 친구가 “장조림 버터 비빔밥”이라는 메뉴를 먹겠다고 했다. 장조림 버터 비빔밥이라니! 생각만 해도 그 맛이 그려졌다. 사실 간장 베이스의 비빔밥은 어린이들을 위한 메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간장도 아닌 장조림 양념에 버터의 조합이라니 생각만 해도 두근거렸다. 나 역시도 친구를 따라 같은 메뉴를 먹어보고 새로운 장르의 비빔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나는, 아이들에게 나만의 비빔밥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뜨거운 쌀밥에 간장을 넣고,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를 넣어 영양 가득 기버터 한 스푼과 김가루를 가득 뿌려 주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된다. 내 아이들은 아빠의 비빔밥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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