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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May 30. 2022

나의 ‘억울한 감정’ 해방일지

나는 왜 억울한가?


출근길에 세탁소에 가는 와이프와 함께 잠시 걸으며, 주말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여보가 아이들한테 이런 이런 부분들은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나는 이런 이런 부분을 노력해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게”

 

나와 아이들의 관계가 좀 더 긍정적으로 개선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아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최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나는 이런 부분이 힘들어, 그래서 난 이런 노력을 하는데, 잘 안돼.”

 

나의 속상한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무언가 내 노력을 설명하며 항변하는 듯한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아내와 인사를 하고 마을버스를 타러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대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서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괜히 나 스스로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내 기분이 왜 상했고, 어떤 감정이 드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를 타서 운 좋게도 비어 있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생각을 했다.

 

어젯밤 마지막화 방영과 함께 종영한 드라마에서 ‘나의 문제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해방’이라는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의 감정은 무엇인가?

 

최대한 가지치기를 하고 나니, 몸통에 남는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고 나니 나는 어려서부터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쉽게 느끼고 그 감정에 유독 힘들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억울함’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억울한 것일까?

 

인터넷으로 ‘억울함’과 관련된 글들을 찾아보았다.

 

그중에 공감을 했던 설명은,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스스로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좌절된 것에 대한 ‘슬픔’이 섞여있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결국 나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지고 우울함이 올 수 있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너무나도 맞는 설명인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내가 느끼는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풀어보았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치가 있고, 그 기대에 맞게 나 스스로는 노력을 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성과로 나오지 않을 때 억울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성과에 연연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억울하다고 느낄까?

 

생각을 해보니 나는 반대로 ‘칭찬’을 좋아하고 칭찬을 받으면 동기부여가 생기는 아이였고, 지금도 그렇다.

 

반대로 나의 노력에 대해서 사람들이 ‘인정’ 하지 않을 때 나는 억울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어느새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극도로 번잡한 시간은 피했지만 여전히 사람은 많았는데, 안쪽에 자리가 있음에도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입구 쪽의 사람들은 힘겹게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의 생각을 이어 갔다.

 

 

 

 

 

아침에 아내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아이들에게 내 나름의 노력을 했는데 그러한 노력을 아내가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나는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아내는 내가 노력하는 부분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알고 있다는 말도 하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의 대화에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식으로 내가 무언가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그런 대화를 회피했던 것 같다.

 

회피할 수 없다면 굉장히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나는 또 강력히 나의 노력을 피력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변명이 필요할 때도 있고, 스스로 변명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생각되어 변명하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빙워크에서 빨리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핸드폰 화면을 보며 미적미적 걷거나 멈춰있는 사람들로 인해 답답함을 느꼈다.

 

나는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서 이런 상황에서도 답답함을 느낄까?

 

그리고 다시 아까 하던 생각으로 돌아왔다.

 

 

 

뒤돌아보면 꼭 나의 노력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인정’해주는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꼭 나의 노력을 알고 인정해줄 필요도 없고, 인정해주는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내 기준에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인정하지 않고 기분 나빠한 적이 많지 않은가?

 

심지어 무빙워크에서 빨리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답답해하는 것도 결국 빨리 앞으로 가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의 기준 때문에 답답하다고 느끼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내가 억울해하는 만큼, 인정받고자 하는 만큼 남을 인정하고 사는가?

 

 

내가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기대치를 낮추거나, 노력을 하지 않거나.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가져가는 것이 성취를 위해 필요할 것이며, 노력하지 않는 삶이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적당히 기대치를 낮추고, 노력하되 스스로의 노력을 스스로 더 많이 인정해주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억울한 만큼 억울할 수 있는 다른 내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인정을 하고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기준에 느리게 걷는 사람에게 빠르게 걷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고, 나름 열심히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노력을 인정하고 격려해주자.

 

 

 

그러다 보니 나와 이런 부분에서 성격이 비슷한 첫째 딸이 생각났다.

 

스스로 높은 기대치를 갖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성취하지 못했을 때 큰 분노와 슬픔을 느끼고, 본인보다 잘 한 사람을 보면 인정하기 싫어하는 성격.

 

굉장히 피곤하지만 나의 성격과 너무나도 닮았다.

 

아내의 노력으로 정말 많이 개선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내려놓을 수 있도록 우리 부부가 부모로서 노력하는 부분이다.

 

 

 

나는 아이에게 아빠로서 정말 노력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격려해주지만, 정말 충분했을까?

 

말로는 그렇게 인정하고 격려했지만 오늘 아침 내가 아내에게 부린 투정처럼, 아이도 그냥 투정이 아니었을까?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의 노력을 인정하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보아야겠다.

 

 

 

그럼 나도 나 스스로에 대해 더 인정해주고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덜 느끼고,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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